브라질이 통산 다섯번째 우승을 차지하면서 2002년 한-일월드컵이 성대한 막을 내렸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그것도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공동개최라는 초유의 형식으로 열린 이번 대회는 세계 언론으로부터 대성공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특히 역사적으로 아픈 과거가 있는 두 나라가 원활한 파트너십을 발휘해 무리없이 대회를 마무리함으로써 양국 관계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주인이 둘인 만큼 양국은 처음부터 비교될 수 밖에 없었다. 대회 준비서부터 운영, 두팀의 성적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이 세계인의 엄정한 심판대위에 올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의 일방적인 승리. 아시아에선 처음으로 '빅 4'에 진입한 한국은 에너지 가득한 응원으로 세계 언론에 뉴스를 제공했고, 깔끔한 운영으로 세계인의 축제를 성공적으로 끝내 '이번 월드컵은 한국인을 위한 잔치'라는 평까지 들었다.
◆성적: 4강 vs 16강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기록.
한국은 아시아에서 최초로 4강 신화를 달성하며 세계인의 찬사를 받았다. 반면 일본은 당초 목표인 16강을 달성했지만 한국의 빛이 너무나 밝아 의미가 퇴색하고 말았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대회전 목표는 16강이었다. 따라서 만약 한국도 16강에 그쳤거나 16강에 오르지 못했다면 일본의 축제 분위기는 더 뜨거웠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은 16강에서 멈춘 반면 한국은 8강을 거쳐 4강까지 쾌속 진격하며 "요코하마로 가자"는 구호를 외쳐대자 일본인들은 한국을 축하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상대적 박탈감이 원래 더 무서운 것이다.
한국은 비록 결승진출에는 실패했지만 3-4위전까지 치르며 마지막까지 '잔칫상'을 받은 반면 일본은 옆에서 구경만 해야 했다.
◆응원: 붉은 악마 vs 울트라 닛폰
이번 월드컵에서 정작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한국인들의 뜨거운 응원 열기였다. '우리에게 이런 에너지가 있었나'하고 스스로 감탄할 만큼 한국팀 경기가 있는 날이면 전국의 거리거리는 붉은 물결로 장관을 이루었다.
연인원 2200만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대~한민국'과 '오! 필승 코리아'를 외쳤다. 일본 역시 자국팀 경기가 있는 날은 파란색 티셔츠를 입고 경기장과 거리에서 응원을 펼쳤지만 양적 질적으로 한국과는 비교할 바가 못됐다.
세계 언론에 한국의 파워풀한 에너지는 관심의 초점이었다. 용광로처럼 불타오르는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이 많은 사람들을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모두들 의아해하면서 경의를 표했다.
한국에서는 월드컵을 계기로 'R(Red) 세대'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동원된 군중들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붉은 티셔츠를 입고 나와 한마음이 된 세대. 계층간 지역간 빈부간 격차를 뛰어넘어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대한민국을 외치는 집단이 전면에 나타난 것이다.
◆국민 사기: 자신감 vs 허전함
이번 월드컵은 한국으로선 단순한 축구의 축제가 아닌 새로운 자신감을 갖게 된 국운 융성의 계기가 됐다. 반면 일본은 16강에 오르고도 뭔가 허전한 기분에 휩싸여야 했다.
한국의 자신감은 4강이라는 결과를 얻기까지의 과정이 드라마틱했기 때문에 더욱 배가됐다.
무엇보다 세계 축구의 최강 그룹인 유럽의 강호들을 태극전사들이 차례로 무찔렀다. 동유럽의 강팀 폴란드를 시작으로 FIFA 랭킹 5위 포르투갈과 우승후보 이탈리아, 무적함대 스페인 등 과거에는 이름만 들어도 지레 주눅이 들었던 상대들을 실력으로 제압했다.
세계 축구의 변방에 머물던 한국이 최중심의 국가들을 차례로 침몰시켰다는 사실은 한국인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축구를 통해 서양에 대해 막연히 지니고 있던 컴플렉스를 말끔히 씻어버렸다.
수십만, 수백만명이 모여도 지난 자리에 쓰레기가 없을 만큼 성숙한 시민의식도 한국인들을 뿌듯하게 했다. 마음을 합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단군 이래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사건이 2002년 6월 한반도에서 일어난 것이다.
◆시설: 상암 vs 요코하마
축구팬들을 위한 배려에서도 한국의 경기장들이 일본의 경기장들보다 앞섰다는 평이다.
개막식이 열렸던 서울 상암경기장과 폐회식이 열린 요코하마 경기장을 비교해보더라도 이런 차이는 뚜렷하게 나타난다.
서울 시내에 자리잡은 상암경기장은 바로 앞까지 지하철이 가는데다 찾기도 쉬워 큰 불편이 없었다.
반면 요코하마 경기장은 신 요코하마역에서 도보로 15~20분쯤 걸어가야 하는 '외딴' 곳에 건설돼 한참 다리품을 팔아야했다. 대부분의 팬들이 도쿄에서 이동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관객들은 경기시작 3~4시간 전부터 부지런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일본이 낯선 외국인들로서는 더욱 힘들 수 밖에 없는 상황.
특히 브라질-독일의 결승전이 열린 날엔 폐회식 후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는 바람에 다시 역까지 걸어와 도쿄로 돌아간 축구팬들은 큰 불편을 겪어야 했다.
또 상암구장이 축구 전용구장이라 관중과 그라운드가 밀착할 수 있었던 반면 종합 경기장인 요코하마 경기장은 웅대하기는 했지만 그런 일체감을 느끼기가 쉽지 않았다.
◆감독: 히딩크 vs 트루시에
한국의 히딩크 감독과 일본의 트루시에 감독은 둘다 외국인 사령탑이라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았지만 결론은 역시 히딩크의 압승.
일본이 16강에 진출하자 트루시에도 한때 영웅으로 격상됐으나 좋은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히딩크가 4강까지 이끈 반면 트루시에는 16강에서 멈췄고, 특히 이탈리아전에서 히딩크가 후반 수비수들을 빼고 공격수들을 대거 투입한 것이 주효하자 트루시에의 소극적인 스타일과 비교돼 일본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한국이 명예국민증까지 수여하며 히딩크감독을 붙잡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쓴 반면 일본은 그런 노력을 기울일 생각을 아예 안했다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차기 감독을 물색하고 있는 일본의 기준은 '히딩크 같은 감독'이다.
< 스포츠조선 김형중 기자 h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