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골드만삭스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짐 오닐은 지난 6월 24일
서울에서 '월드컵과 경제'라는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과 터키가 4강에 진출한 것은 신흥시장(emerging market) 국가들의
장기적인 성공을 알리는 신호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월드컵 이변은 세계축구계의 지각변동을 넘어 미국·유럽·일본 중심의
세계경제 패턴이 바뀔 것임을 예고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오닐의 '예언'이 아니더라도 지금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자긍심·자부심과 함께 '하면 된다'는 자신감에 충만해 있다.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길거리 응원'을 통해 표출된 역동적이고 자발적이며
개방적인 국민들의 에너지를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공감대도 형성되고 있다. '경제 8강', 심지어 '경제 4강'이라는
꿈같은 구호들까지 등장하고 있는 분위기다.
지난(至難)한 목표이지만 우리 사회가 '할 수 있다'는 의욕에 차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전제돼야 할 일들이
있다. 축구대표팀의 히딩크 김독이 보여준 것처럼 무엇보다 우리의 현재
역량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함께 이를 글로벌 수준으로 높이기 위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프로그램(전략)이 필요하다. 기초를 탄탄하게
다지지 않은 채 막연히 기대치만 높이는 것은 실없는 짓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열광적인 축제의 한마당이 막을 내린 지금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현실세계로 복귀하는 것일 터이다. 월드컵의 환희와 감동의
순간들을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마냥 황홀경에
빠져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경제강국의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면
먼저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월드컵이 한창이던 지난 6월 21일 무역협회가 주최했던 '신무역전략
토론회'에서 제프리 존스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회장은 "우리가 (다국적
기업들에) 서울이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이 될 것이라고 하면 '꿈 깨라.
불가능하다'는 반응이다"고 말했다. 월드컵을 계기로 우리 사회는
한반도가 조만간 세계의 중심이 될 것 같은 기대감에 부풀어 있지만
현실은 이토록 냉엄하다.
그뿐인가. 얼마 전 세계적인 신용평가기관 무디스는 한국 은행들의
재무건전성이 79개국 중 70위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했다. 전적으로
승복하기는 어려운 평가이지만 그래도 4대 개혁 중 가장 앞서 있다는
금융부문도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 세계경제 동향도 심상치 않다. 중남미 경제가 총체적 위기국면에
빠져들면서 그 파장이 우려되고 있고, 미국발(發) 금융·경제 불안
가능성도 예사롭지 않다. 월드컵 영향으로 지난 6월 중 산업생산 활동이
둔화되고 수출도 부진했던 것을 제외하면 우리 경제는 그동안 비교적
순항(順航)해 왔지만 하반기 전망은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더욱이 우리 경제를 압박하고 있는 대내외 불안요인들을 냉철하게
주시하면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더 심한 열병(熱病)을
앓고 있는 모습이어서 불안하다. 지난 6월 26일 정부가 내놓은 '포스트
월드컵' 대책에서 드러난 이 정부의 흥분상태는 심각한 수준이다.
'2010년까지 국민소득 3만달러대의 경제강국 실현', '자동차·철강 등
15개 주력산업의 세계 5위권 진입' 등 화려한 장밋빛 전망 일색이다.
'에펠탑에 필적하는 대규모 건조물 건립' 운운은 그 중에서도
'압권'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발연대식(式) 구호가 아니다. 월드컵의
국가이미지 상승효과가 저절로 경제적 성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태극전사들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강도 높은 체력강화 훈련을
받았듯이 우리 경제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글로벌 스탠더드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도 만만치 않은 사회적 진통을 각오해야 한다. 월드컵 신화를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지금 우리가 딛고 서있는 현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金基天/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