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말 르네상스를 이뤘지만 '미완의 개혁'을 남겨두고 훌쩍 떠나신
정조대왕. 수원 팔달산 서장대에 다시 오른다면 뭐라 하실까?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에 흐뭇해하실까? 한성(漢城)은 거의 없어졌지만
수원 화성(華城)은 길이 남으니 연무대로 가서 그 신궁 솜씨로 축복의
화살을 날리실지도 모른다. 정조의 리더십은 화성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야 하리라.
◆ 인구 100만 수원, 인구 1만 화성
2002년, 수원은 인구 백만을 드디어 넘겼다. 기초자치단체로서는 첫
백만도시다. 정조의 화성 계획인구였던 최대 1만(주택 계획호수 1천
호)에 비하면 백배는 커졌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화성 내의 현재 인구는
1만5000이니(건물 3천여동), 계획이 좋았던 것 아닐까.
팔달문과 장안문 사이 거리는 1.2km, 전체 면적은 40여만평이지만
시가지는 20여만평이다. 동서남북 네 구역으로 나누어져서 편안하게
걸어다닐 만한 거리이고 성곽의 드라마틱한 곡선 프로필이 한눈에
잡힌다. 남북 성문 주변은 번화한 시장통이고 수원천을 따라 재래시장도
활발하니 이 동네 저 동네 기웃거리기도 좋다.
옛도심은 다행스럽게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신시가지 개발에 밀린
탓이지만 크게 보면 잘된 일이다. 사실 화성내 가장 활발한 개발은
복원사업이다. 화성을 만드는 전 과정을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라는 책으로 만들어둔 덕분에 복원이
쉽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으로 유명한 행궁(行宮)도 2002년 드디어 1차
복원되었다. 기록이란 정말 귀중하다.
◆ 긴 계획 짧은 공사, 명분과 실리
될성부른 작품일수록 계획과 설계기간은 길고 공사기간은 짧다. 치밀하게
준비하고 실행은 재빨리 해내는 것이다. 정조 15년의 계획기간을
고려한다면(등극하자마자 구상을 시작했을 듯 싶고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겼을 때는 이미 구상이 완료되었던 것 아닐까?), 총 5.744km,
높이 5미터의 성곽, 577칸의 행궁과 41여개의 시설 공사를 2년 10개월에
끝낸 것은 놀라운 추진력이다. 월드컵 경기장 건설 정도의 기간이다.
탁월한 설계자로서의 다산 정약용, 훌륭한 공사감독으로서의
체제공(정조때의 명 재상)은 화성의 숨은 영웅이다.
탁월한 작품일수록 명분 뒤에 실리가 있다. 화성이 아버지에 대한 애도,
어머님의 노후를 기쁘게 해드리려는 '효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국민을 설득하고 반대세력을 잠재우려는 명분이었을게다. 정조는
리더십을 강화하려는 실리적 목적을 화성에서 다각적인 방법으로
모색했다.
18세기 말(1796년 완공)에 성곽도시를 새로 만든다는 것은 사실 조금은
이상한 일이다. 더구나 화성처럼 평지의 교통요지에. 정조는 방어 목적
보다는 왕이 컨트롤하는 군대 양성을 합리화하려 한 것 아닐까. 군대용
둔전(屯田)을 여유롭게 잡았던 것도 그런 이유 아닐까?
화성에는 상업과 교역 활동을 강화하려고 일부러 특혜까지 주면서 8도의
유명 상인들을 유치했었다. 행궁 앞 종로에 가깝게 만들어진
'팔부자(八富者)길'이라는 상가길이 지금은 동네 시장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다. '세계부자길'이 되어도 성에 안찰 판인데….
◆ 물 귀한 수원(水原)에 물 담은 저수지를
정조의 감탄할만한 위업은 화성 광역의 저수지 사업이다. 물이 귀한데 왜
수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모를 이 평야에, 저수지를 통해 물을
공급함으로써 농업을 융성시켜 화성의 자급자족기능을 높이려는
혜안이다. '서호'와 '만석거' 등 저수지를 만든 정조는 100년 전
미국의 유명한 조경가 옴스테드를 다시 100년 앞지른 광역적
생태조경가라 자랑할만 하지 않을까.
지금도 수원천이 마르지 않는 이유는 상류 저수지 덕분이다. 몇년 전
화성 내 수원천 복개를 한다고 해서 시민들이 들고 있어났었다. 다행히
살아남은 수원천. 여전히 화홍문 아치 밑으로 풍성한 물이 흘러넘치고,
내 어릴 적 빨래터였던 수원천은 지금 생태계의 보고다.
◆ 가장 기본적인 것이 가장 아름답다
정조의 리더십은 실무자를 발탁하고 실용 제안을 독려했다는 점이다.
정교하게 자른 큰 돌을 이어붙이는 방식, 전벽돌을 구워내어 쌓았던
축성방식, 공격과 방어의 기본에 충실한 설계가 그래서 탄생했다.
공심돈, 화서문, 화홍문, 방화수류정, 팔달문의 독특한 건축미학 역시
기능적인 선택, 기본에 충실한 단순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계획된 신도시 화성,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와 예술과 과학기술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작품. 그리 일찍 떠나지 않으셨더라면 정조의
리더십은 근대 한국에 어떤 기회를 마련했을까? 리더십의 중요성이
사무치는 때다.
(김진애/건축가·㈜서울포럼 대표 jinaikim@seoulforum.co.kr)
●복원후 화성의 청사진?
화성 성벽은 팔달문 양측 외에는 거의 복원되었고, 수원시는
'행궁'외에도 기록에 남아있는 화성내 시설을 대부분 복원할 예정이다.
이런 복원 이후에 화성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가 관건이다. 어떤
르네상스가 가능할까?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그는 성의 도시다. 수원보다 작은, 그러나
국제도시다.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로 유명하지만, 사실은 모차르트
고향을 현대판으로 번안한 것 아닐까. 그 성을 보면 노래 소리가 들릴
듯하다. 지금도 모차르트 축제철이면 세계의 선남선녀들이 모여들고, 옛
귀족의 '빌라'와 왕족의 '성채'를 빌려 휴가를 보내며, 곡선이
독특한 간판이 유명한 거리에서 쇼핑을 하고, 알프스 초원을 기웃댄다.
화성의 성벽에서는 무슨 음악이 들릴 수 있을까? 애석하게도(?)
진지하기만 했던 정조대왕은 화성에 로맨스까지 불어넣는 르네상스를
이루지 못했다. 우리 후손들은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전통의
복원만으로 찾고 싶고, 머물고 싶은 르네상스 도시가 될 수는 없다.
화성은 그 전체가 '민속촌'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어떻게
전통과 미래가 어울리고 일상과 예술이 어울리며 르네상스를 만드느냐?
수원의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