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각 속에도 약간의 진실이 실려있다. 멀리서 그리던 아득한 그리움이
선연한 진실로 드러날 때 환각의 마력은 더욱 강해진다. 지난 몇 주
동안, 대한민국 국민은 붉은 색 환각 속에 꿈을 꾸고 춤을 추었다. 그
꿈과 춤 속에 담긴 진실은 승리다. 단 1승을 얻기까지 장장 48년이나
걸린 월드컵 본선, 그 귀중한 첫 승을 얻은 후 단숨에 몇 고지를
뛰어넘어 세계8강에 든, 실로 기적과도 같은 승전보를 이룬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가 갈파한 한국의 현대사의 특징은 무서운 역동이다. 한
역사학도의 수사를 빌면 단 반세기동안 가히 석기시대에서 초현대에
이르는 변화가 일어난 땅이다. 그러나 그 역동이 무섭다. 굉음의 폭발이
흔들고 지나간 뒤에 따를 지각변동이 두렵다. 마치 새 세기와 함께 이
땅에 히딩크라는 벽안(碧眼)의 구세주가 출현한 듯하다. 소년 시절,
원조물자 배급우유의 낯선 온화함에 놀란 창자를 달래면서, 추수가 끝난
썰렁한 벌판, 깡똥한 벼 포기들의 태클을 피해가며 논바닥에서 짚세기
공에 서툰 발길질을 내던지던 세대에겐 그 감회는 차라리 서럽다.
14일, 붉은 전사들이 포르투갈을 상대로 성전을 벌일 때 해운대의 한
신식 호텔에서 초로의 길에 접어든, 그 시절 소년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법학논문의 저술방법과 표절문제를 논의하던
전국법과대학장협의회였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는 권학가를
들으면서 향학열을 불태운 이들은 배급우유처럼 낯설었던 '저작권'
이라는 차가운 근대의 법제도를 이 땅에 정착시켜야만 한다. 그것이
학자의 양심, 타인에 대한 도리, 후세에 대한 책임이다. "못난 미련은
떨쳐버리자, 저 바다 멀리 멀리." 노래방 가사와는 다른, 입에서 입으로
내려온 '원조 해운대 엘레지'가 새 시대를 알린 자유연애의 성지, 정작
이름을 지어준 신라의 문장가는 이미 신화의 세계로 물러나지 오래다.
겹겹이 근대문물로 치장한 오늘의 해운대를 다스리는 지배자는 이제는
사라진 '극동'호텔의 301호실을 전세 내고 이따금씩 바다를 노려보며
선글라스를 애용하던 '최고회의 의장'의 망령이다. 폭염에 쫓긴 백만
인파가 몰려들어도 간이 화장실 하나 없던 해운대, 그 곳에 위용의
자태로 군림하는 신식 호텔에서 김훈의 '칼의 노래'(2001)를 애독한
사내들이 함께 울었다. 그리고는 다짐을 주고받았다. 이제는
잊어버리자고. 서럽도록 못난 과거를.
18일 밤, 짚세기 소년은 다시 한 번 진한 환각의 춤을 추었다. 관악산
아래에 주저앉은 '근대법학 백주년 기념관'의 대형 스크린 앞에서
환호작약하는 법학도들과 함께 로마제국과 피렌체의 침몰을 보았다.
'환(環) 태평양 한국학' 학술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모국에 온
유랑소년도 넋을 잃고 풀어졌다. 삼십년 째 뉴질랜드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그는 키위를 닮아 대머리가 되었다며 실없이 웃는다. 골든골! 순간
'마오리 마음, 마오리땅'(1986)의 저자의 눈에 방울방울 맺힌 뜨거운
진주를 나는 보았다. 우리는 말없이 두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체온
따라 무언의 맹약을 교환했다. 친구여, 이제는 "못 믿을 세월 속에
날려보내자." 그 아팠던 기억들을.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붉은 색의 축제를 연다. 그것도 22년 전, 그
잔인했던 피의 광장이었던 광주에서. '폭동'이 '민주화 운동'으로
진정된 황지우의 땅에서 붉은 색이 평화와 사랑의 색임을 확인할 것이다.
이제는 이겨도 져도 좋다. 친구여, 아내여, 아들딸들아, 이미 이룬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러니 경기의 끝남과 동시에 잊어버리자.
그리고는 찬찬히 '4강'보다 중요한 것을 생각하자.
모든 신문이 스포츠신문으로 변해, 특호활자로 도배질하는 이 땅의
언론을 질책하자. 인기와 여론이라는 도깨비 따라 일희일비하는 경박한
세태를 반성하자. 남의 글을 '퍼담아' 제출한 기말 레포트를
되돌아보자. 지성의 본산이라는 서울대학교의 총장선거에서조차도 룰을
지키려는 후보가 불이익을 입는 부조리를 반성하자. 다시 손에 책을
들자. 질서를 생각하자. 생업으로 돌아가자. 환각이 이룬 일말의 진실은
이내 사라지는 것, 또 다른 고단위 환각제의 유혹을 결연코 뿌리치자.
'쪽집게 고액과외'가 거둔 성공이 건전한 나날의 삶 속에
뿌리내리도록.
(안경환·서울법대 학장·전국법과대학장협의회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