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제주 한림 선착장에서 뱃길로 3.5㎞. 비양도를 향해 19t짜리 도항선은
천천히 미끄러졌다. 안개로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뱃길을 레이더에
의지해 방향을 가늠해나가는 선장. "피서철 반짝 하고 외지인들이
늘지만 7·8월 지나면 그만이라 하루 두 번밖에 배를 운항하지
않는다"는 임태종(47)씨는 "우도, 마라도에 비하면 비양은 오지 중에
오지"라고 말했다.
비양도(飛陽島)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생일'이 있는 섬이다.
21일로 꼭 1000살. 조선시대 인문지리지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고려
목종 5년(1002) 6월, 산이 바다 가운데서 솟았다. 산에 네 개의 구멍이
터지고 붉은 물을 5일간 내뿜고 그쳤다"고 기록된 섬이 바로 이곳이다.
6월 21일을 섬의 생일로 믿고 있는 섬사람들은 해마다 조촐한 잔치를
벌이지만, 올해는 한 달을 지나 7월 21일 한가롭게 '천년맞이 축제'를
치르기로 했다.
섬은 1000년 세월 아름다움을 한가득 안고 있다. 포구는 맑다. 한여름
멸치떼가 몰려오면 그 자리에서 건져올려 회를 친다. 해발 114.1m의
비양봉에는 4개의 분화구가 있다. 동쪽 분화구는 해발높이가 땅과 거의
근접해 있어서 지질학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봄이면 노란 야생나리가
흐드러지고 가을이면 은빛 억새물결이 출렁이는 비양봉. 겨울이면
철새들이 날아와 하얗게 뒤덮는 풍경이 장관을 이룬다.
바다에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기다린다. 길이 500m, 너비 50m 규모에
비췻빛 바닷물을 담고 있는 연못 '펄랑호'와 화산암 돌밭에 기이한
형상으로 우뚝우뚝 솟은 용암바위들. 해안도로를 반바퀴쯤 돌면 이끼가
파랗게 낀 거대한 바위를 만나는데, 그 이름이 '애기 업은 돌'이다.
뭍으로 간 남편을 기다리다 갓난아기를 업은 채 망부석이 된 여인의
형상. 용암굴에나 있는 용암기둥이 해변에 우뚝 선 것은 세계적으로도
희귀하다고 했다.
전국 어디에나 있는 세 가지가 비양도에는 없다. 자동차와 가축, 그리고
식당. 섬을 더럽힐까봐 가축 사육도 하지 않는다. 때묻지 않은
아름다움은 천연의 생태계만이 아니다. 순박한 인심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식당이 없어 굶게 생긴 이방인에게 생선뼈에 무·고추·파를
숭숭 썰어넣어 맑은 국물을 끓여낸 이장집 안주인은 "조영게(자전거)로
혼(한)바퀴 돌아봅서. 20분도 안 걸릴거우다"라며 아들의 자전거를
내주었다.
한때 이곳은 '개발' 표적이었다. 섬 전체를 국제도박장으로 만들겠다며
거액을 제시한 사람도 있었고, 요즘도 호텔을 짓고 싶어 찾아오는
외지인들이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섬, 욕보일 수
없다"며 고개를 젓는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 시절 갈아 얹은 슬레이트
지붕이 지금까지 남아있고, 24시간 전기가 들어온 것도 불과 5년 전
일이다. 1989년까지 무려 30년간 이장을 맡아온 윤만선(67) 노인회장은
재미난 일화를 들려줬다.
"섬에 물이 안나완 서답(빨랫감)을 들곡(들고) 한림으로 나갓주.
지금추록(지금처럼) 기계선도 아니곡, 막배를 젓엉 한림서 비양으로
돌아오는 질인디, 한겨울에 배가 뒤집어진거라. 다행히 사름(사람)은 다
살앗주. 집사름은 두솔(두살)짜리 아돌(아들)을 안곡 얼음물을
빠졍나왓주. 이장 배가 전복됐다는 뉴스가 나오니깐 군수랑 도지사가
깜짝 놀렌, 그제사 해저 수도란 걸 설치해?주." 지금도 물은 본섬에서
바다 밑으로 연결된 수도 파이프를 따라 들어온다.
그러나 섬이 지닌 아름다움은 그만큼 섬이 낙후되었음을 방증한다. 주민
수도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주민등록상 비양도 인구는 162명이지만 실제
거주인구는 70명 안팎. 한때 100명에 육박했던 비양초등학교 학생 수는
전교생 6명으로 줄어들었다. 바다 건너 한림초등학교 분교가 된 것이
벌써 20년 전이다. 때문에 젊은 사람들은 "섬이 발전하려면 배도 좀 더
들어와야 하고, 식당도 서너군데 생겨서 관광객을 끌어들여야 한다,
바닷가에는 야자수를 갖다 심고 돌 박물관을 세워서 외지인들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주민들은 요즘 들어 마을 회의를 자주 연다. 7월 21일 개막하는
'천년맞이 축제'도 그렇고, 전기를 대주는 화력발전소를 풍력으로
바꿔야 한다는 생태환경운동가들의 제안도 의제로 올랐다. 최근의 안건은
여행객들에게 쓰레기값을 받으라는 군청의 지시였다. 그러나 부결됐다.
"삶이란 웃으멍 사는 건디, 어떻게 손님들에게 돈을 받수까."
천년 원시의 세월을 간직한 때묻지 않은 섬, 그러나 생존을 위한 개발을
눈앞에 두고 고심하는 사람들. 신철주 북제주군수는 "천년축제는
비양도를 한국의 대표적인 생태 휴양지로 발전시켜나가는 발판이 될
것"이라고 일찌감치 선언했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다. 토박이
사진작가 서재철씨는 "마라도는 30대 남짓한 자동차로 완전히 망가졌다.
비양도만큼은 오염을 발생시키는 어떤 요인들로부터도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주도 생태체험 전문업체인 '뭉치' 김영훈 대표도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천혜의 환경을 털끝 하나 상하지 않게
개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분명한 건 저개발로 낙후됐던 '천년 세월'이 이제 앞으로의 천년을
살아움직이게 할 가장 큰 자산이 되리란 사실이다. 비양도에 눈길을 주고
있는 곳은 오히려 외국이다. 6년 전 '액션 아시아'란 홍콩 관광잡지가
처음 이곳을 소개한 뒤, 영국의 '더 타임스' 신문이 비양도 이야기를
실었고, 미국 CNN 방송, 영국 BBC 방송, 그리고 '내셔널 지오그래픽'
TV다큐멘터리팀이 이곳을 세계에 소개했다. 제주도로 취재를 왔다가
비양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갑작스럽게 섬을 취재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하늘에서 날아온 별이라는 뜻의 비양도는 푸른 하늘과
비옥한 땅, 그리고 청정한 바다를 한꺼번에 체험할 수 있는 진기한
섬"이라고 보도했다.
◆내달 21일 천년맞이 축제/ 일주일간 다양한 행사
지난 17일, 물질 다녀와 늦은 점심을 후딱 해치운 비양도 해녀들은
부산을 떨었다. 오랜만의 외출. 그것도 이 앞 한림이 아니라 배 타고
버스 타고 가야 하는 제주 시내다. 양복 말쑥이 차려입고 일찌감치
부두로 나온 성급한 남자들은 여자들 늑장을 타박하면서도, 꽃화장에
날아갈 듯 차려입은 아내가 싫지 않은 기색이다.
이날 제주시에서는 비양도 사진전이 개막됐다. 천년맞이 축제를 기념,
상명대 사진학과 양종훈 교수와 학생들이 2년간 이 섬을 드나들며
카메라에 담아온 비양도 사람과 풍경들. 7월 21일부터 일주일간 열리는
'비양도 천년맞이 축제'를 앞두고 맛보기로 먼저 열리는 행사다.
큼지막하게 액자에 내걸린 자기 사진을 보고 해녀 문복희(47)씨가 입을
함지박만하게 벌렸다. "아이구 부치러와라(부끄러워라). 주름솔(주름살)
좀 보라게. 언제 영 늙어부런". 말은 그래도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한
얼굴엔 기쁨이 넘친다. 아이들은 제가 아는 얼굴 앞에서 입을 막고
키득거린다. 배 안에 제상을 차려놓고 용왕님께 안전을 비는 아낙,
해초를 싣고 느릿느릿 마을로 돌아오는 노부부, 주사를 맞으며 울상짓는
코흘리개 아이…. 천년의 섬은 펄떡이며 사진 속에 살아났다.
천년맞이 축제는 비양도를 속속들이 즐길 다채로운 행사로 꾸며졌다.
오름 오르기, 자전거 타고 해안도로 달리기, 수산물 채취 경연,
숭어잡이, 어선 퍼레이드, 수중 생태 탐방 체험교실 등. 마을이 있는
압개 포구에는 1000년 기념비가 세워지고, 야영장에서는 천년제례를
봉행한다. 비양도에 가려면 북제주군 한림선착장에서 매일 오전 9시,
오후 3시 운항하는 도항선을 이용하면 된다.
(飛陽(제주도)=金潤德기자 sio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