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작자가 되기 전, 광고 마케터로서 근 17년 동안 2700여편의
영화를 접했다. 적지 않은 양이다. 그런데도 내 기억 속엔 어릴 적,
감수성 예민하던 시절에 보았던 흑백 TV속 '주말의 명화'가
대부분이다. '푸른 화원'에서 코에 빨래집게를 걸고 자던 리즈 테일러,
'제3의 사나이'의 그림같은 낙엽길, '카사블랑카'의 슬픈 공항에서의
이별, '애수' '라스트라다'….

제법 넉넉했던 큰누나네 집 안방에서 어린 나이에 봐서는 안 될 키스
장면들을 한밤중 어른들이 깰까 봐 몰래 숨죽여 보며 가슴 두근거리던
때가 있었다, '시네마천국' 처럼. 나도 커서 저렇게 사랑해 봐야지….
그 어린 나이에도 영화처럼 살아보고 싶었다. 그때의 TV 흑백영화들 덕에
어쩌면 지금 이 영화판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작년 가을, 휴가차 경주를 찾았다. 시내 곳곳에 곱게 단장된 이름도
복잡한 외국산 꽃들을 보며 참 잘 꾸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뿐이었다.
한적한 교외로 나선 순간 길 옆에 코스모스와 억새풀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흐드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미 단순한 꽃이 아니었다.
지나온 과거로, 가슴 절절한 나만의 흑백 추억 속으로 빨아들이는
안내자였던 것이다.

그리움을 찾고, 그리움을 다시 그리워하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우리가 만든 영화를 몰래 숨죽이며 보고 있을 또 다른 어린 감성들과
바람같은 추억을 먹고사는 사람들을 위해…. 죽는 날까지 가지고 갈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가는 길과 하는 일이 다르다한들 이런 욕심이 어찌
나만의 것이랴.

(석명홍·씨네라인II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