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프랑스 대표팀의 평가전에서 붉은악마 회원들이 막대 불꽃을 흔들며 열띤 응원을 하고 있다.


'붉은 악마'(Red Devils)가 2002 한·일 월드컵을 통해 국제적
브랜드로 떠올랐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서포터(응원단)인 '붉은
악마'는 철저한 상업주의 배격과 아마추어리즘을 고집하는 신세대
응원단. 서울 광화문·시청의 40만명 거리 응원전을 주도하고,
경기장마다 붉은 물결을 이뤄낸 이들의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 탄생의 순간 =붉은 악마의 '전설'은 지난 95년 12월 16일 오후,
서울 대학로의 카페 '칸타타'에서 시작됐다. PC통신 하이텔의 10여개
'축구동호회' 운영자 10여명은 이날 축구 응원문화의 개선을 위한
회의를 갖고 '칸타타 선언'을 채택했다. 이들은 한국식 축구문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국가대표 공식 응원단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 선언
이후 국가대표팀 경기마다 300~400명 단위로 한국팀 유니폼을 입고
자신들을 '서포터'라고 부르는 '단관'(단체관람:붉은 악마들끼리
사용하는 말임) 모임이 등장했다.

지난 96년 여름 한국―중국 국가대표팀의 축구경기가 열린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3만여명의 관중들 틈새에서 300여명이 될까말까한
일단의 '무리'가 붉은 색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섬처럼 떠있었다.
당시엔 '붉은 악마'란 이름도,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도 없었다.
수만명 관중들 틈에서 이들의 존재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목놓아 '아리랑'과 '애국가'를 불렀다. '붉은 악마' 초창기 멤버인
노형기(盧炯基·35·에스콰이어 자금팀)씨는 "난데없이 등장한 우리를
보고 정보과 형사들이 '당신들 정체가 뭐냐'고 묻기도 했다"며
"PC통신에서 한국팀 응원단을 모은다는 공고를 보고 처음 국가대표팀
경기에 나간 날이었다"고 말했다.

치우천왕

◆ 명칭의 유래 =붉은 악마(Red Devils)라는 이름은 조직 탄생 1년
반만에 지어졌다. 처음 이름은 '그레이트 한국 서포터스'였다. 그러다
98년 프랑스 월드컵을 한 해 앞둔 97년 5월 1일 하이텔 축구동호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한국 대표팀을 만들겠다'는 공지와 함께 명칭을
공모했다. '레드 일레븐' '레드 맥스' '꽹과리 부대' '쿨리건'
'레드 워리어즈' 등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름에 '레드'가 들어가는
것이 가장 큰 공통점이었고, 그 중 83년 멕시코청소년축구대회 이후 우리
대표팀의 별명으로 사용되곤 했던 '붉은 악마'에 대한 호응이 가장
컸다. 97년 8월 '붉은 악마'는 한국 대표팀 서포터의 공식 이름으로
채택됐다.

붉은 악마를 상징하는 '치우천왕(蚩尤天王)'상은 기원전 2707년부터
109년간 중원의 배달국가를 다스린 인물로 전쟁에서 반드시 이겼다는
전설의 주인공. 붉은 악마가 '뜨면서', 기업체들마다 치우천왕을 탐을
내고 있지만, 붉은 악마는 단 한 차례도 이 치우천왕의 상업적인 이용을
허락한 적이 없다.

◆ 철저한 아마추어리즘 =붉은 악마의 응원 연습과 경기 관람은 붉은
악마 홈페이지를 통한 온라인 연락으로 이뤄진다. 붉은 악마의 원칙은
아마추어리즘. 각 지역에서 경기가 열릴 때 응원을 주도하는 것은
중앙조직이 아니라 해당 경기가 열리는 지부들이다. 부산에서
한국―폴란드전이 열리면 붉은 악마 영남지부가 응원을 진행하는 식이다.
곽형덕 지원팀장은 "거대한 응원물결을 이뤄낸 힘의 근원은 축구에 대한
'순수한 열정' 외엔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서울
신문로 대한축구협회 건물 4층에 있는 5평 남짓한 붉은 악마 사무실엔
평소 근무하는 인원이 10명도 채 안된다. 회원들은 주로 통신문화에
익숙한 20대로 구성되지만, 지부장이나 사무국 일은 30대들이 맡고 있다.
온라인으로 가입한 일반 회원들의 연령대는 초등학생에서 노인들까지
다양하게 구성돼 있다.

◆ 월드컵 끝나면 중앙조직 해체 =현재의 붉은 악마는 '너무
거대해졌다'는 것이 붉은 악마 스스로의 진단이다. 붉은 악마는 이번
월드컵이 끝난 직후 중앙조직을 '해체'하고 각 지부 나름대로
운영해가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것이 그동안 자신들이 추구해온
스포츠정신에 더 부합한다는 판단 때문이다.

당초 '붉은 악마' 브랜드의 상품화를 반대했지만 조직이 커지면서
현대자동차 3억3000만원, SK텔레콤 3억원, 외환카드 3억원 등 10억원대의
스폰서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월드컵이 끝나면 스폰서 계약은 모두
끊긴다.

신동민(30) 홍보팀장은 "몇백명에서 시작해 11만명 회원에 수억원의
예산을 집행하는 '거대조직'이 됐지만, 초창기 일체의 영리와 권위를
배제키로 한 아마추어 정신만은 잊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