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대학은 공부 벌레들의 천국이 아니다. 하루 24시간 중 8시간
공부는 기본. 여기 더해 "사회 봉사는 필수"라고 하버드대 한국계
학생들은 말한다.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이들은 언어 장벽과 외양의 차를 뛰어넘어 미국
고등학교 졸업생 최고의 영예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세계적인
수재들만 모인다는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을 뿐 아니라, 총학생회장을
배출하기도 했다. 이들은 자신의 오늘을 만든 힘으로 "우리를 믿어준
부모와, 배움의 진정한 가치를 일깨워준 교사, 그리고 다양성과 창의성,
책임감을 중시하는 교육"을 꼽았다. 자신들 이야기를 담은 '완벽한
학생들'(조선일보사)을 펴내고 서울을 찾은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어렸을땐 아둔한 아이였다
=내가 완벽하다고? 부모님이 일단 믿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지고
발전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나는 어렸을 때 세상에서 가장 아둔한 아이였다. 태어날 때부터
과체중이었고, 도대체 뭘 빨리 알아듣는 아이가 아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글씨를 못쓴다고, 수학이 뒤떨어진다고, 축구를 못한다고
놀림을 받았다. 엄마가 나서지 않았다면 나는 영영 뒤처졌을지도 모른다.
수학 교사였던 엄마는 나를 앉혀두고 5분 내에 100문제 푸는 훈련을
시키셨다. 수학으로 학교에서 주목받게 되자 나는 뒤늦게 공부에
자신감을 갖게 됐고 과학과 음악, 요리에까지 그 영역을 넓혀갔다.
=책 제목을 보고 조금 놀랐다. 공부 잘한다고, 명문대를 갔다고 해서
완벽하다고 할 수 있을까. 어쨌든 지금 내 모습을 조국인 한국 분들이
자랑스러워하고, 역할 모델로 삼으려 한다는 것이 기쁘다.
◆방대한 과목에 입 딱 벌어져
=하버드에 입학하던 날 방대한 책 한권짜리 카탈로그를 받고 입이 딱
벌어졌다. 무려 40개 분야로 구분된 학문의 영역에는
애프로아메리칸학(미국흑인학), 민요, 신화 연구부터 천문학,
천체물리학까지 수많은 과목이 있었다. 역사 철학 생물학 화학 경제학
음악 작문 미적분학 스페인어 독일어 라틴어 등 나는 듣고 싶은 모든
과목을 신청했고, 과외활동과 병행하기 위해 한달에 절반 이상은 밤을
샜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은 시험들을 치러야 했다.
=언어학 학사 과정과 석사 과정을 동시에 밟고 있다. 4년 코스중 3년을
마쳤다. 4학년 때는 석사 논문을 쓸 예정이다. 동시 학위과정은 매우
어려운 길이지만,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데는 아주 좋다.
선택과목까지 치면 학업 량은 정말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수강하고 싶은
과목이 너무 많다.
=학비를 벌기 위해 방과 후 개인 교습을 한다. 틈틈이 대학 신문에
미술비평을 쓰고 학교 문학 잡지에서 일하니 빈 시간이 거의 없다. 다들
공부와 봉사일로 바빠서 함께 어울리려면 미리 약속을 해야 한다.
=하버드대에는 놀라운 수재들이 많지만, 취미활동을 빼놓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 이미 대학원 학생들에게 물리학을 가르쳤던 경제학과 친구는
요즘 고전 밸리 댄스를 배우는데 시간을 쪼개쓴다. 내 룸메이트는 기타와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 하버드의 학생들은 자신을 어떤 한계에 가두지
않는다.
◆대통령상은 사회봉사-리더십 중시
=대통령상 수상자 선정 기준과 내가 노력해왔던 목표가 비슷하다는 데
놀랐다. 선정위원회는 봉사할 줄 아는 마음, 리더십, 열린 마음을 원하고
있었다.
=친구도 지원서를 받았는데, 사회봉사활동을 너무 적게 해서 자격이
안된다고 포기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고 함께 수상한 다른 지역
학생들을 만날 때까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미국서도 고등학생은 힘들다
=고등학교 생활이 항상 즐겁지는 않았다. 성공을 향해 줄달음질치는 다른
학생들과의 경쟁 속에서 압박감을 느꼈다. 어떤 선생님들은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점수를 주는 사람들이 되어갔고 학생들은
선생님들의 추천서를 얻기 위해 경쟁했다.
=경험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훌륭한 선생님들도 많았다. 지적 성장의
원천으로서 학교는 여러 수단중 하나일 뿐이니 결코 학교에만 의존하지
말라고 하셨다.
=오전 7시15분부터 2시까지 수업했다. 늦어도 6시30분에는 일어나야
수업을 들으러 갈 수 있었다. 미국 고등학교에서는 시간을 어떻게
조직하고 효율적으로 쓰느냐가 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좋은 대학 가려면 엄청나게 공부해야 한다. 뉴욕에도 과외 학원이 많다.
나도 SAT(대학입학자격시험) 때문에 여름방학 내내 학원에 다녀봤는데 큰
도움은 안됐다. 열심히 하는 아이들도 많지만 가방 메고 왔다갔다만 하는
아이들도 많다.
=공부도 잘해야지만, 봉사 활동이나 지역사회 활동이 없으면 아무
대학에서도 대접을 못받는다. 방과 후에 자원 봉사를 했다. 심장 재단을
위한 기금을 모금하고, 공원에서 쓰레기를 줍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모두
학생들 스스로 조직하는 일이다. 배움 그 자체로만 머무는 것은 이기적인
행위라고 생각했다.
=이민노동자회관에서 자원봉사하면서, 부당한 것에 대항할 가장 강력한
힘은 지식이란 걸 깨달았다. 그때 경험 덕에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데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우릴 만든 건 부모님의 사랑
=아버지는 전형적인 한국 아버지다.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자식이 좋은
교육을 받게 하려고 수십번씩 이사를 다녔다. 진로를 앞두고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부모님 뜻대로만 살았다면 그들이 딸에게 바랐던
성공과 행복도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이 서로 사랑한다는 게 정말 중요하다. 아무리 바빠도 저녁은 한국
음식으로 꼭 함께 먹었고, 돈이 많지 않았지만 때때로 고급 식당에도
갔다. 엄마와 아빠는 자식들에게 예쁜 옷을 입혀 나들이 하는 것을
즐거워하셨다. 그런 노력들이 부모와 자식 사이에 신뢰를 안겨줬다.
그래서인지 공부하라는 잔소리도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같다.
=한국서 대학가기 어려워 중고등학교 때 미국 오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한다. 내 경우 부모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너무 자유가 많아, 혼자 방치돼 있으면
위험해진다.
◆어릴 때부터 리더십 훈련받아
=학교에 아시아계라고는 나와 내 동생뿐이어서 놀아줄 사람이 없으면
무조건 도서관에 갔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문둥이 성자 다미안'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의대에 진학한 것도 다미안 신부처럼 병든 사람을
돕겠다는 결심을 했기 때문이다.
=고립감을 이겨내기 위해 들춰보기 시작한 것이 언니의 책들이다. 랭보,
엘리엇의 시와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자서전, 우파니샤드… 뭐든
닥치는 대로 읽었다. 책에서 나는 다른 사람이 가졌던 사상, 투쟁, 열정
그리고 무엇보다 삶 자체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접할 수 있었다.
=지금 내 가슴에 항상 품고 있는 말은 '리더를 기다리지 마라. 혼자서도
일대일로 봉사하라'는 마더 테레사의 교훈이다. 봉사 활동은 부끄러움을
잘타는 나를 바꿔놓았다. 다양한 방식으로 책임을 맡아보니 리더가 되는
것, 모범을 보이는 일에 점점 익숙해져갔다.
=고등학교 시절의 활동이 리더십 훈련엔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우리 학교
퀴즈팀을 이끌며 학교 대항 퀴즈 대회에 나가면서 정말 리더십이 뭔지
깨달았다. 리더에게는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제일 중요하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 알아내는게 중요하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리더십이다. 크게 꿈을 꿔야 큰 생각이
나온다. 가장 실패한 유형의 사람은 아마도 자신에게만 매몰되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참석자
▲애런 리(20세·의대·2000년 수상) "의사가 되어 제3세계
어려운 나라에 가서 5~10년 동안 일하고 싶다".
▲이수진(21세·생물학과) "공공정책에 관여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찰스 장(21세·언어학과·99년 수상) "이중언어교육에 관심이 많다.
학생들에게 영감을 주는 위대한 선생님이 되고 싶다".
▲미셸 전(20세·사회학과·2001년 수상) "로스쿨에 진학, 국제법,
인권법과 관련된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
◇미국 대통령상/ 250만명중 140명 선발
고교생들에게 시상하는 미국 대통령상은 50개주에서 남녀 각 1명씩
선정한 우등생과 미국령에서 선발한 약간명, 예체능계 우수 학생 등 매년
140명 안팎에게 수여된다.
1964년 시작된 이 상은 레이건 시대를 거치면서 리더십과 사회 봉사가
강조되었다. 선정위원회는 후보학생들이 쓴 에세이와 사회봉사 기록을
평가, 수상자를 결정한다. 1998년부터는 수상자가 추천한 교사도
대통령상을 함께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