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핵무기 감축협정 조인으로 미국과 러시아는 냉전의 틀을 청산하고, 새로운 전략적 동반자 관계의 틀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양국 정상회담으로 양국은 냉전 이후 지속된 상호불신을 해소, 완전하게 새 국면을 열게 됐다.
전략핵무기를 1700~2200기로 각각 감축하고,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을 2009년까지 유지하기로 한 것은, 지난 12월 미국의 ABM(탄도탄요격미사일) 협정 탈퇴로 그동안 불안하게 유지돼온 핵무기에 대한 구속력을 확보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특히 막판까지 조율을 놓고 협상팀이 고민했던 핵무기 폐기안에 대해서는 미국의 요구대로 ‘저장’토록 하는 데 합의, 양국은 서로의 입장을 원만하게 수용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영국 BBC방송은 “상당한 규모의 감축 협약은 미국 정부의 승리이며, 러시아로서는 지구상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과 핵 균형 유지를 포기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미국은 협정에 조인하자는 러시아의 요구를 받아들인 대신, 중앙아시아 미군 주둔 등 상당부분의 협조를 얻은 것으로 알려져, 양국이 서로 실익을 챙겼다는 해석이다.
부시 대통령은 협정 조인 후 공동기자회견에서 "나는 이번 협정 및 공동선언문이 러·미 관계를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새 단계로 발전시킬 것을 확신한다"며, "양국은 오랜 불신에서 벗어나 새로운 우호 협력의 장을 열었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도 "세계 안보와 전략무기 감축, 새로운 세계질서 구축 등과 관련, 러·미 관계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두 정상은 전략핵 감축협정 외에 경제협력 증진 방안 등을 주요 의제로 다뤘다. 푸틴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미국의 대(對)러시아 무역제재 해제와 러시아의 대미(對美) 석유수출 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경제적 동반자 관계를 열 것을 제안했다. 러시아가 서방 시장경제 체제에 편입하기 위해서는 WTO(세계무역기구) 가입이 선행돼야 하며, 이를 위해 미국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전했다. 부시 대통령은 오는 6월 14일까지 러시아의 시장 지위 부여에 대한 결정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의 대러시아 투자를 규정하는 ‘잭슨·바니크’법의 폐지도 요구했다. 1974년 미국이 러시아 태생 유태인들의 해외이민과 인권 등에 관한 정책을 연계시켜 미국의 대러시아 무역특혜를 철폐한 이 법으로 러시아는 매년 부담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또 세계 제2위 산유국인 러시아의 대미 석유수출 증대 방안과 미국의 러시아 투자문제 등도 논의됐다고 NTV방송, 일간 이즈베스티야 등 러시아 언론들은 보도했다.
게르만 그레프 러시아 무역장관은 기자들에게 “석유 분야에서의 양국간 관계 강화는 러시아가 미국에 안정적인 석유공급을 보장하면서 ‘전략적 동반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로버트 카드 미국 에너지 장관도 최근 “미국은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대한 석유수입 의존도를 낮추면서 원유수입 다변화 조치의 일환으로 러시아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양국 정상은 25일 푸틴 대통령의 고향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방문, 한반도 문제 중앙아시아 미군 주둔 문제 카스피해 자원 개발 등 광범위한 현안들에 대해서 논의할 예정이다. 또 오는 28일 로마에서 개최될 나토·러시아 정상회담을 앞두고 나토군의 평화유지 활동과 러시아의 나토 내 위상 문제 등에 사전 교감을 가질 것으로 전해졌다.
( 모스크바=鄭昺善특파원 bschung@chosun.com )
●예정시간 20분 넘기며 회담...웃음꽃 만발
부시 미국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정상회담과 기자회견에 이르기까지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양국 정상은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과 블라디미르 루샤일로 크렘린궁 안보회의 서기가 각각 배석한 가운데 회담을 하며 가끔 큰 웃음 소리를 냈으며, 회담은 예정 시간을 20분이나 넘기며 계속됐다.
부시는 크렘린궁 규모와 인테리어에 압도된 듯 회담장까지 가는 2분 동안 무려 4차례나 "뷰티풀(beautiful)"을 연발했다. 그는 회담에 앞서 "러시아 공부를 많이 하고 왔다"며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도 읽었다"고 말해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기자 회견장에선 푸틴이 "부시 대통령은 대단한 로비스트"라며, "회담을 시작할 때 '우리 수준에서 대화할 내용은 아니지만…' 하면서 꼭 경제·무역문제를 꺼낸다"고 말하자, 부시 대통령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푸틴은 또 “러시아가 보잉사 여객기를 도입하는 데 가격이 비싸다”며, “(미국이) 러시아 알루미늄과 철강을 수입해 간다면 제조비용이 절감돼 싼 값에 여객기를 팔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부시 대통령은 다시 한번 크게 웃었다.
러시아 언론들은 부시 대통령이 정상회담이나 기자회견에서 늘 사용하던 ‘미국이…’, ‘우리가…’, 식의 미국 우월적 표현 대신, 화두(話頭)마다 ‘러시아가…’ ‘러시아는…’이라는 표현으로 상대국을 배려, 러시아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고 말했다.
(모스크바=鄭昺善특파원 bschung@chosun.com)
● 미·러 전략무기 감축조약 요약
- 현재 6000기인 미·러 전략 핵탄두수를 오는 2012년까지1700~2200기로
감축.
-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효력을 2009년 까지 유지.
- 군축 이행 위한 쌍무 이행위원회 설치.
- 군축 협정의 양국 의회 비준.
- 협정의 유엔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