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로 떠난 탈북자 정현씨의 어머니 장인숙씨는 “아들은 한국의 학연 ·지연을 뚫고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었다 ”고 말했다.<a href=mailto:leedh@chosun.com>/이덕훈기자 <


"당초 한국에 올 때 많은 기대를 했지요. 하지만 아들은 이곳에 살면서
현실의 장벽이 너무나 두텁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그냥 밥이나 먹고
사는 것은 가능했겠지요. 그러나 그 이상은 어려워요."

서울 수서동에 있는 임대아파트. 실내는 어둡다. 설거지를 하던
장인숙(61)씨는 "아들은 한국의 학연·지연을 뚫고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이 고민했었다"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아들 정현(37)씨는 지난 98년 한국을 다시 떠났다. 현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서 자동차 부품 수입상을 하고 있다. 또 콩 농사를 지을
땅까지 550㏊를 구입해 놓았다. 지난 90년 우크라이나에서 유학을 하던
중 탈출한 아들은 한국 생활 8년 만에 다시 자신이 벗어났던 지점인
우크라이나로 되돌아간 것이다. 물론 국적은 한국인으로 바뀌었다.

"아들은 서울에서 대학을 다시 다닌 뒤 S물산에 취직했지요. 해외 무역
부서에서 철강 거래를 맡았습니다. 이곳에서 근무하며 모은 봉급으로
북한에 남아있던 저와 두 남동생까지 데려왔어요. 그런 뒤 아들은 안정된
직장을 3년 만에 그만뒀습니다. 유학 시절을 보냈던 우크라이나로
나가겠다고 했을 때 저도 말리지 않았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한국인과
탈북자를 구별하지 않거든요."

지난 98년 아들은 500만원을 들고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시(市)로
건너갔다. 음악 복제 CD를 팔면서 다른 한편으로 시장조사를 했다. 거래
업종을 하나씩 늘려갔다. 이제 연간 2억~3억원의 매출을 올리게 됐다.
그는 비자 만료 기한인 2년마다 한 번씩 국내에 들어와 잠깐 머물다 다시
나간다고 했다.

지난 94년 탈북한 강모(43)씨도 국내보다 중국에서 머무는 시간이 훨씬
더 많다. 중국에 집과 사무실을 갖고 있다. 북한에 있을 때 외화벌이
업체의 부사장이었던 그는 이제 십분 경력을 살려 중국의 광산 개발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한 번 더 자신의 인생을 업그레이드 시키기 위해 해외로의 꿈을 꾸고
있는 탈북자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는 중이다. 너무 많은 기대를 갖고
들어온 한국 사회. 하지만 이들에게는 쉽게 진입할 수 없는 철옹성임을
알고 난 뒤다.

탈북자 허모(48)씨는 "어느 탈북자를 만나서 물어보던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하는 것보다 한국 사회 속으로 진입하는 게 더 어렵다고
대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북한을 탈출했다면, 이제
더 나은 삶을 위해 해외로 떠나는 셈이다.

아직은 중국이 주요 무대다. 북한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체류 경험이
있던 중국이 익숙한 까닭이다. 한 탈북자는 "기껏 중국을 오가면서
보따리 장사를 하는 수준"이라며 "미국과 일본은 아직 동경의
대상일뿐"이라고 말했다. 통일부에 따르면 현재 외국에 나가있는
탈북자의 숫자는 32명쯤. 하지만 정확한 수치는 아니라고 했다. 탈북자의
개개인 행적을 일일이 파악하기에는 그 숫자가 너무 늘어났다는 것이다.

탈북자 홍모(35)씨에게도 해외 바람이 불었다. 그는 "같은 말 쓰는
사람끼리 왜 이렇게 가슴 아프게 살아야 합니까"라며 "나갈 수만
있다면 한국을 떠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처음 두만강을 건넜다가 잡힌 뒤 96년 다시 재탈북한 경우다.
한국에 들어오기 전 중국에서는 날품팔이·어부·막노동 등 안 해본 게
없다. 허기에 지쳐 쓰레기통을 뒤져 배와 수박 껍질을 먹었다. 한국에
들어오겠다는 꿈이 없었다면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들어왔지만 이제 한국에서 살아나갈 자신이 없어요. 또
자의식 때문인지 몰라도 '(북한을 탈출했기 때문에) 한번 배반자는 또
배반할 수 있다'는 주위의 시선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곳 사람들은
처음에는 호기심을 보였지만 더 이상 제게 관심이 없어요. 대학교에
들어가 1년 만에 그만뒀어요."

한때 목욕탕에서 때밀이로 일했으나 손님들과 언쟁이 잦아 오래 버틸 수
없었다. 한번은 음식점을 차렸다가 실패했다. 그는 중국에서 보따리
장사를 하겠다며 여권을 신청했다. 그러나 출국 목적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여권은 발급되지 않았다. 어느 쪽에 문제가 있었든 풀리는 일이
없었던 셈이다.

"저보다 뒤에 탈출한 여동생은 일본에 사는 큰아버지를 방문한다며
출국했어요. 거기서 큰아버지의 소개로 한 철도원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한국은 자유 사회라고 하지만 탈북자에게는 자유로운 것 같지 않아요.
내 여동생처럼 방법만 있다면 해외로 나가 살 겁니다."

탈북자 전영복(29)씨는 작년 12월 호주 이민국에 난민 신청을 했다. 그는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홍콩으로 출국한 뒤 캐나다로 건너갔다. 그런 뒤
캐나다에서 다시 호주로 갔다. 호주에 입국할 때는 어학 연수 비자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난민 신청 심사는 현재 계류 중이다.

그와 가깝게 지낸 탈북자 김모(34)씨는 "북한과 너무나 다른 풍토
때문에 전영복씨가 답답함을 이겨내지 못한 까닭"이라고 전했다.

"그는 함북 온성에서 탄광 일을 하다가 목숨 걸고 두만강을 건넜지만,
오히려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것을 더 힘들어 했습니다. 지난해부터
도박도 하고 생활도 헤펐어요. 아마 6차례나 여권 발급을 신청한 것으로
압니다. 그가 어학 연수 방식으로 나가 난민 신청을 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런 뒤 그는 "사실 저도 미국이나 호주에서 멋있게 한번 살아보겠다는
꿈을 늘 꾸고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 기획취재팀 >

( 팀장=崔普植 사회부 차장대우 congchi@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