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코미디언 남보원 선배를 김해공항에서 만난 건 재미있는
우연이었다. 남 선배는 지난해 돌아가신 원로가수 고운봉 선생의 생전에
친형제처럼 절친한 사이였고, 나는 며칠 뒤 방송에 나가서 고운봉 선생의
대표곡인 '선창'을 부르게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보원이란 이름은 물론 예명이고, 본명은 어느 국회의원과 똑같은
김덕룡이다. 어릴 적부터 한주먹 하던 그는 일찌감치 건달 흉내를 내다가
대동고등학교를 불명예 퇴학을 당하고 성동공업에 보결로 들어갔다.
그것도 "힘 쓸 기회가 더 많을 것 같아서" 토목과를 택했단다.
장세동씨가 고교 선배이고, 후배로는 가수 오기택씨가 있다.
폭 력전과로 '별'까지 몇개 단 남 선배는 우연히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서 숨겨졌던 '끼'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휘파람
피리'와 성대묘사, 그리고 '왔구나아아~' 걸쭉하게 늘어지는 이은관
선생의 '신배뱅이굿' 버전으로 인기를 모으면서 톱 코미디언으로 떴다.
남 선배는 "연예인이 되지 않았으면 지금쯤 늙어 이빨 빠진 건달로
끝났을 것"이라며 너털웃음을 웃곤 한다.
서울행 비행기에서 남 선배 옆에 앉은 나는 주위 승객들이 방해받지 않을
정도로 나즈막히 '선창'을 불러나갔다. "형님, 이렇게 부르는 거
맞습니까?" 남선배는 차분하게 "아냐 아냐. 거기선 그렇게 부르면 맛이
안나. 잘 들어봐. '우울려고 내가아~와았나~'"
내가 '프로 가수'도 아닌 남 선배로부터 '선창'을 코치받겠다고
덤벼든 데는 사연이 있다. 고운봉 선생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영결식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른 새벽부터 연예계의 많은
동료·후배들이 검정 옷에 검정 넥타이를 매고 모여들어 선생을 마지막
떠나보내려 하고 있었다. 엄숙한 영결식이 중간을 넘길 즈음 사회자가
말했다. "다음은 고인과 형·동생의 우의를 다져오신 남보원 선생님께서
애도의 말씀을 해주시겠습니다."
그저 바라만 봐도 웃음이 터지는 남 선배가 예의 미국배우 찰스 브론슨
스타일로 마이크 앞에 나섰다. "저는 30년 이상 고인을 형님으로 모시며
온갖 사랑을 받았습니다. 형님께선 세상을 뜨시기 한참 전부터 독실한
기독인이 되셨습니다. 평양 위문공연 때도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오셨길래 봤더니 전부 찬송책과 성경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형님이 기독교에 귀의하셨으니 노래도 신령하게
기독교식으로 부르셔야 한다구요. 그리고 제가 '선창'을 은혜 넘치게
바꿔서 불러드렸지요. 그걸 여러 내빈 앞에서 다시 불러보겠습니다."
그리고는 시골 할머니들이 '예배당'에서 흔히 부르는 청승맞은 찬송가
곡조로 '우울려고 내가 왔나~우스려고 와았나~아멘'을 끝까지
불러나갔다.
어느 누구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영결식장은 단박에 웃음바다로
뒤집어졌다. 이 지구상에 이토록 '웃기는' 영결식이 또 있었을까?
하지만 호상(好喪)인데다가 남 선배가 생전의 고운봉 선생을 얼마나
극진히 모셨는지 잘 알기에 모두들 정말 유쾌하게 웃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헌화순서 때 60년대 인기였던 '블루벨스' 남성 사중창단 출신
박일호 선배가 꽃을 들고 나가자 남선배는 또 한마디 던졌다. "야!
일호야. 너 죽으면 우리가 느이들 노래 '잔치 잔치 벌렸네' 그거
불러줄게!" 우리는 깔깔거리며 남 선배의 넉넉한 여유에 전염됐다.
비행기가 서울에 내리자 사람 좋은 남 선배는 한사코 나를 붙잡았다.
"영남아. 우리 강남 가서 기막힌 평양냉면 먹자. 내가 사줄게."
공항에는 형수님이 차를 대놓고 계셨다. 그 옛날 금호동 월세방에서
가난한 신혼살림을 시작해 알뜰하게 살림을 늘리고 예쁘고 착한 딸
하나를 키우면서 내조한 '아름다운' 형수님이셨다. 그동안 번 돈이야
내가 더 많았겠지만, 그날 나는 꾹 참고 형님과 형수님이 사주시는
냉면과 만두를 얻어먹었다. 그런 추억을 간직하는 후배의 특권을 누리고
싶어서 그랬다.
( 조영남 / 가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