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고 있는 '징병제 개선' 논의의 초점은 우리
군의 병력 규모를 줄이고 지원병제를 도입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몇가지 전제조건을 생략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지원병제와 복무 단축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 가지 전제조건에 자문자답해 보아야 한다.
첫째, 한반도 긴장사태는 점진적으로 완화될 것인가? 한반도는
지구상에서 가장 긴장이 높은 곳이다. 극단적으로는 핵공격 가능성까지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북한은 사정거리 1만㎞에 이르는 대포동2호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면서 '1000만배 보복'을 공언하고
있다.
북한의 위협이 사라진 통일 이후에는 한반도 긴장이 완화될까?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긴장은 대부분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에서 기인하고 있다. 북한의 위협이 없어져도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통일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의 세력균형이
깨질 경우 한반도는 지금보다 더 큰 긴장에 휩싸일 수도 있다.
둘째, 우리나라 인구가 증가하거나 최소한 현 수준을 유지해 나갈
것인가? 우리나라 병역자원은 근대화 과정에서 생겨난 인구억제 정책으로
인해 1980년대의 연간 34만명에서 26만명으로 감소했다. 더구나 결혼연령
지연, 독신자 증가, 남아선호 경향에 자녀 안 갖는 풍토까지 겹쳐 향후
병역자원은 지속적으로 감소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국방부는 현 병력규모를 유지할 경우 연간 32만명이 소요되기
때문에 2003년 이후 병역대체 복무를 축소 또는 폐지할 계획이라고 한다.
더구나 복무기간을 2개월 단축할 경우 연간 2만2000여명의 추가인력이
소요되고 8%의 숙련병이 감소된다. 107만명의 정규군에 5년 이상
복무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북한과의 전력 격차는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셋째, 수년 내 선진국 수준의 첨단무기체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혹자는 첨단무기체계를 도입해 군 병력을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 우리 군은 16조원의 국방비를 쓰고 있다.
이 중 전력투자에 소요되는 예산은 5조원에 불과하다. 우리 군이
미래전력으로 획득하려고 추진하고 있는 주요 장비의 대당가격을 보면
FX전투기 1000억원, KSS-Ⅱ 잠수함 4400억원, 조기경보기 4000억원
등이다. 특히 일본이 6척(2척은 추진중)이나 보유하고 있는 이지스함의
1대 가격은 1조원에 육박한다. 1개 보병사단을 감축할 경우 560억원이
절감되는데 이지스함 1척을 구입하려면 17개 사단을 감축해야 한다. 우리
전력증강의 한계를 절감케 하는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징병제 개선논의가 아직은
시기상조임을 명백하게 제시해 준다. 그러나 장기적 측면에서는
지원병제를 바탕으로 한 병력감축이 바람직한 만큼 이러한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나가야 할 것이다. 우선 미래전력에 대한
투자비를 대폭 확충하기 위해 현재 GDP대비 2.8% 수준인 국방비를 우리와
안보위협이 비슷한 국가들의 수준인 4∼5%대로 증액시켜야 한다.
다음은 병사들의 업무를 대체할 수 있는 직업 부사관(하사관)의 비율을
점진적으로 늘려 나가야 한다. 일본·영국·미국은 모두 강한 부사관을
바탕으로 지원병제를 시행하고 있다. 30만명의 지원병을 운용하려면
국민소득이 최소한 2만달러는 넘어야 한다는 것이 국제사회 정설이다.
군 복무기간을 단축하고, 가고싶은 사람만 군대 가는 지원제를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희망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며,
우리가 처해 있는 안보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만약의 결과를 치밀하게
예상한 가운데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야 한다. 전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담보로 하는 안보정책에서 시행착오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이상훈 / 대한민국 재향군인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