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4학년 때(1984년), '백일몽'이라는 블랙 코미디 단편영화를
만들었는데, 당시 충무로 기획자 한 사람이 그것을 장편으로 만들자는
제안을 해왔다.
드디어 20대에 감독 데뷔를 하나 보다 하고 열심히 장편 시나리오로
각색했으나 그 기획은 무산되었다. 그 후 4년 가까이 그 시나리오를 손에
쥐고 수없이 고쳐 쓰며 기회를 잡으려 했으나, 현장 경험이 전무한
나에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결국 그 대본은 조감독 시절부터
욕심을 내온 강우석 감독에게 팔았고, 그의 3번째 작품('나는 날마다
일어선다')으로 만들어져 개봉(1989년)했다.
일단 시나리오 작가로 충무로에 입성했지만 여전히 감독 데뷔는
어려웠다. 그대로 있다간 영원히 감독되기 힘들 것 같아 단편 영화
하면서 몸에 밴 헝그리 정신으로 아예 직접 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데뷔작으로 나온 것이 '부활의 노래'(1991)다. 당시로선 민감한
소재인, 광주 항쟁을 다룬 영화다.
기획은 무일푼에서 시작했다. 후배들과 힘들게 모은 2000만원으로 촬영을
시작했고, 비디오 판권을 미리 팔아 당시로서도 최저 예산인 1억원에
완성했다. 제작 과정도 그야말로 악전고투였지만, 검열 때문에
개봉까지의 길은 더욱 힘들었다. 결국 군데 군데 잘린 채로 지방
극장까지 직접 필름을 들고 뛰어다니며 겨우 개봉(1991년 3월)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데모 한번 한 적 없던 나는 그 영화 개봉 이후 운동권 감독으로 낙인
찍혔고, 2년 가까이 가족과도 연락을 끊은 채 경기도 광명시 후배 집
으슥한 지하 골방에서 자취하며 다음 작품 시나리오를 준비했다. 그래서
또 3년 만에 만든 게 '두 여자 이야기'(1994년)다. 충무로 제작
시스템에서 나온 것이니, 새로운 데뷔인 셈이다. 그 영화로 여기저기서
상을 받으면서 진짜 감독이 됐음을 실감했지만 관객 동원에는 또
실패였다.
내 자신을 철저히 세속화시키기로 마음먹고 만든 영화가
'편지'(1997년)다. 이 영화가 대박을 터뜨려 나는 그야말로 흥행
감독이 되었고 관객과의 의사소통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드디어
만끽했다. 개봉 전날, 가족을 위해 예매표를 사려고 극장 앞에 줄을
섰는데 바로 내 앞에서 매진되었다. 황당해 있는 내게 제작부장이 달려와
"감독님 여기서 뭐하세요?"하면서 표를 구해 주었다. 꽉 들어 찬 관객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의 감독 데뷔가 마무리되었음을 느꼈다.
( 이정국 / 영화 감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