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향(38) 감독은 데뷔작 '미술관 옆 동물원'(98년)으로 41만
관객(서울 기준)을 동원했고, 대종상·청룡영화상·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감독상·각본상을 거머쥐었다.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성공한, 보기
드문 '화려한' 등장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작품까지 그렇게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 감독
스스로의 표현을 빌리면, "차라리 조용히 데뷔한 것만 못해 거의
재기불능 상태에 빠지는 게 현실"이다. 그런 부담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가 완전히 아마추어 배우만 기용해서 두 번째 작품을 냈다. 충북 영동
산골서 호두농사 짓는 김을분 할머니와 꼬마 배우가 주인공인
'집으로…'(4월 5일 개봉)는 첫 작품 후 4년 만에 나왔다.
'집으로…'는 폭폭한 세상에서 순정하고 아름다운 관계들을 담는다.
혼자 아들을 키우던 젊은 엄마가 생활고에 못이겨, 떠나온 지 10년이
넘은 시골집으로 아이를 맡기러 간다. 듣긴 해도 말을 못하는 77세
할머니와, 전자오락기·롤러블레이드로 무장한 7세 외손자의 몇 달에
걸친 동거가 빚어내는 갈등과 눈물, 사랑 이야기다.
―첫 작품에 이어, 또다시 전혀 만날 것 같지 않은 이질 커플의 '우연한
동거'다.
"의사 소통이 불가능할 것 같은 관계, 생면부지인 관계도 만나고
이해하면 사랑하게 된다고 본다. 세상과 격리된 채 둘이 자주 만나게
하려니까 동거로 간 것이다. 직장인들을 다뤘다면 한 직장에 다니는
것으로 설정했을 것이다."
―영화 말미, '이땅의 모든 외할머니께 이 영화를 바칩니다'라는
헌사가 나온다.
"태어나서부터 재작년 외할머니가 아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까지 줄곳
함께 살았다. 오빠와 여동생 사이에 꼈던 나는 엄마보다 할머니에게 더
의지했다. 그런데도 할머니에게 못할 짓을 많이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마치 천애고아 남매로 지내다 오빠를 잃고 혼자 남은
심정이었다."
―할머니역과 다른 주요 배역을 모두 현장에서 찾았다는데.
"연출팀과 전국 방방곡곡을 발로 뛰었다. '왠지 그곳에 가면 찾을 것
같다'는 느낌이 와서 충북 영동에 갔는데, 바로 그곳에서 김을분
할머니를 만났다."
―아마추어 배우들이라 만족스런 연기를 끌어 내기가 쉽지 않았겠다.
데뷔작에 스타를 기용한 것에 비하면 파격이다.
"김 할머니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평생 영화관 한번 안 가본
분들이었다. 할머니·할아버지들은 글을 몰라 그 장면 분위기를 일일이
말로 설명한 뒤 찍고 또 찍었다. 영화 내내 등장하는 김 할머니가 특히
고생을 많이 하셨다. 딸에게 '자고 가라'며 손짓하는 장면은 17번을
찍었다. 첫 작품은 데뷔작이란 부담 때문에 안전하게 스타를 쓴 거고,
이번엔 내 맘대로 한번 만들어 보고 싶었다. 진짜 시골 사람들 맛을 기성
배우들이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촬영 현장에서 매섭게 다그치는 것으로 유명하다는데.
"별명이 헐크다. '지옥의 묵시록'에 나오는 말론 브란도처럼 산간
오지에 성(城)을 구축하고 전권을 휘두르는 성주처럼 굴었다."(웃음)
그를 영화 감독으로 이끈 것은 중학생 때 만난 재난영화
'타워링'이었다. 주인공 폴 뉴먼에게 반한 그는 청계천 헌책방에서
일본 잡지를 뒤졌고, 고등학생 땐 하길종 감독의 영화를 보고 감독이
되겠다고 결심, 시나리오를 습작했다. 영화에 미쳐, 전공(서강대 불문과)
관련 노트 필기가 거의 없는 대학생이었다.
―시나리오도 직접 썼다. 그렇게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뭔가?
"새벽 2~3시부터 아침까지 밤을 꼴딱 새며 썼다. 촬영 기간엔 평균
3시간씩 자며 다음날 촬영분 콘티를 수정했다. 사는 게 힘들고 지친
관객들에게 내 영화가 조금이라도 위안이 됐으면 하는 게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