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축구협회에서 발간한 '한국 축구 백년사'는 근대적 축구의 도입을
19세기 말의 일로 본다. 쇄국정책이 한창이던 1882년, 인천에 입항한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Flying Fish)호 승무원들이 부두에서 축구를
즐기다 조선의 군졸에게 쫓겨 공을 놓고 달아나면서 축구가 전해졌다는
것이다.

축구는 화끈한 국민적 정서와 잘 맞았는지 보급이 매우 빨랐다.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 공으로 장독대를 깨고 달아나는 사건이 '사회
문제'로 비화돼 심심찮게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당시 경기를 보면
출전선수나 시간에 대한 룰이 없어 양팀 십수명의 선수가 공을 쫓다가
한쪽이 지쳐 '백기'를 들어 올리면 경기가 종료되는 명실상부한
'동네축구'였다. 골 포스트가 없었기 때문에 골키퍼가 앉은 자세로
팔을 들어올린 뒤 위로 지나가는 슈팅이 무조건 '노골'이라고 우기는
일도 흔했다고 한다.

1921년 벌어진 제1회 전조선 축구대회에선 '오프사이드 룰을 인정할
것인지'를 두고 응원단간에 주먹다짐이 벌어져 백주 대로에서 쫓고
쫓기는 활극을 펼친 끝에 대회 자체가 무산된 기록도 있다. 한국의 첫
번째 '훌리건 사태'가 벌어진 것이니 축구장 난동엔 동서고금이 따로
없는 모양이다. 당시 신문들은 헤딩슛을 두탄(頭彈), 골킥을 문축(門蹴),
페널티킥을 벌축(罰蹴)이라 부르며 경기 상황 전달에 열을 올렸다. 한국
축구는 1929년 경성(서울)과 평양 간의 유명한 '경평전'이 전국민적
관심 속에 막을 올리면서 발전의 본궤도에 진입하게 된다.


▲한 경기 개인 최다골
올레그 살렌코(러시아) 5골. 1994년 미국월드컵 대 카메룬전에서.
러시아가 6대1로 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