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만난 경선(이혜영ㆍ왼쪽)과 수진(전도연)은 살아남기 위해 투견장 판돈을 털기로 한다.

불법 투견장, 전직 권투선수와 전직 라운드 걸 커플, 사채업자, 궁지에
몰린 여성 택시 기사와 피비린내 나는 주먹질, 그리고 "돈 가방을
뺏아라!"

16㎜로 찍은 단편 4편을 모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2000년 평단과
관객을 놀라게 했던 신예 류승완 감독이 첫 장편으로 '피도 눈물도
없이'(3월1일 개봉)를 내놨다. 현란하지만, 새롭진 않다.

느린 화면,
급정지 화면을 이용한 편집, 경쾌하고 박진감 넘치는 음악과 장면 전개
등은 '죽거나…'와 인터넷 영화 '다찌마와리'에서 맛뵈기로 보여줬던
감독의 개성을 활짝 피워내지만, 한편으로는 '저수지의 개들' '펄프
픽션'의 ?틴 타란티노 감독과 영국 신예 가이 리치 감독의 영향을
뚜렷하게 드러내보인다.

이들 영화와 이미 낯을 익힌 관객이라면 비교도
해가며 재미있겠지만, 정통 내러티브 영화에 익숙한 관객에겐
왔다갔다하는 싯점과 시간 흐름이 어리둥절할 수도 있겠다.

극도로 낮은 앵글에서 올려 잡은 화면이나 엉뚱한 사건 진행으로 득을
입는 주인공 등은 가이 리치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스(Rock,
Stock and Two Smoking Barrelsㆍ1998)'와 흡사하며, 도박 투견장이란
설정 역시 가이 리치의 '스내치(Snatchㆍ2000)'의 불법 맨주먹 권투
경기장을 연상시킨다. 급정지 화면으로 등장 인물을 설명하거나, 한
사건을 놓고 다른 관점에서 원인과 전개를 영상으로 보여주고, 화면
분할로 여러 인물과 정황을 한꺼번에 내보이는 방식 역시 타란티노나
가이 리치의 영화에서 낯을 익힌 기법이다.

인천의 한 도박 투견장. 후끈 달아오른 투견장 내부는 일확천금에 눈 먼
군상들로 가득 차있다. 분방한 록음악과 느린 화면, 정지 화면이 빠르게
교차하며 등장인물을 소개한다. 투견장을 운영하는 독불(정재영)과 애인
수진(전도연), 취객의 희롱에 시달리는 택시 기사 경선(이혜영), 한몫
잡아보려는 웨이터 '채민수'(류승범)를 재빨리 소개하는 도입부가
지나면, 2시간 가까운 상영 시간 내내 영화는 한순간도 느슨해지지 않고
관객을 급회전판에 올린다. 여기엔, 격렬한 카메라 움직임과 동선
큰 액션이 속도감을 더한다.

경선은 빚에 시달리고, 한다리 건너 사채업자는 빚을 갚지 않으면 어린
딸을 해치겠다고 죄들어온다. 우연히 경선의 택시를 들이받았다가 경선을
알게된 수진은 투견장 거액 판돈을 함께 빼돌리자고 경선을 꼬드긴다.
최고의 판돈이 걸린 투견 경기를 기획한 것은 바로 그 사채업자. 삶의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두 여자는 한탕해서 삶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이를 이용하기로 한다.

핑핑 돌아가는 이야기에 양념으로 맛을 내는 것은 다양한 조역들과 유머
감각이다. 사채업자 KGB(신구)의 이름은 김금복. KGB란 머릿글자가 주는
음험함과 어딘지 느슨해보이는 신구의 외양, 그리고 김금복이란 촌스런
이름의 대비가 웃음을 안긴다. 독불에게 당하다 나와선 "내 영혼까지
빼앗진 못할거야"라고 폼을 잡는 채민수의 '다찌마리' 풍 대사,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쉽잖을 것 같은 한물 간 주먹패 칠성파(백일섭, 김영인,
백찬기) 같은 인물 등은 우리가 '촌스럽다'고 밀어내버린 70년대 한국
액션 영화에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영화의 중심엔 이혜영, 전도연이라는 개성있는 두 여배우가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 오랫만에 돌아온 이혜영은 삶에 지치고 찌든 모습을
매력적으로 보여줬고, 전도연은 팔색조같은 변신을 또한번 증거한다.
권투 선수 출신으로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독불역 정재영의 발견은 이
영화의 수확.

제목과 달리 영화에는 피와 눈물(그리고 주먹질, 발길질, 칼질)이
넘친다. 화려한 발차기와 주먹질, 개싸움처럼 엉겨드는 싸움판, 여자에게도 가차없는 폭력은 근래 어떤 한국 영화보다도 낭자한 유혈극을
연출, 한국 영화에는 '금기'란 게 없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 폭력 묘사에 관한 한 한국 영화는 세계 수준의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해도 과장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