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터 유럽 12개국에서 유통되기 시작한 유로화는 통일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다른 유럽국가들 특히 프랑스가 꾸며낸 음모의 산물이라는
시각이 있다. 통일독일의 막강한 경제력에 불안감을 느낀 프랑스가
소인국의 걸리버처럼 독일을 꽁꽁 묶어버리기 위해 통화통합이라는
올가미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마르크화가 독일의 경제적 헤게모니와
불가분의 관계였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독일은 이 같은 '프랑스의 음모'를 역이용할 수 있는
묘수를 마련해놓고 있었다. 바로 '성장과 안정 협약' 체결을
통화통합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어 이를 관철시킨 것이다.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3%, 국가 채무는 GDP의 60%를 넘을 수 없다는 강력한
규정을 마련해 씀씀이가 방만한 다른 유럽국가들에 대해 독일식 규율과
절제를 강요한 것이다.
▶그런 독일이 협약에 의해 가장 먼저 문책을 받는 처지가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최근 독일과
포르투갈의 재정운용에 대한 '조기경보'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재정적자가 GDP의 3%에 육박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경고를
내린 것이다. 최종 결론은 오는 12일 열리는
유럽 경제재무 각료이사회에서 내릴 예정이지만 독일로서는 이미
톡톡히 체면을 구긴 셈이다.
▶유럽 최대 경제대국인 독일이 이 같은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은
세계적인 경기침체의 타격이 컸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지난해
내수 촉진을 기대하고 단행한 대규모 세금감면의 영향으로 독일의
올해 재정적자는 GDP의 2.7%에 달해 유로 회원국 중에서 최악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만일 재정적자가 3% 상한선을
넘어서면 최대 GDP의 0.5%에 달하는 엄청난 벌칙금을 물어야 한다.
▶자신이 설치한 덫에 걸려든 꼴이 된 독일은 요즘 조기경보 안건이
각료회의에서 통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회원국들을 설득하느라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슈뢰더 총리는 최근 뉴욕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 연설에서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는 조치'라며
EU 집행위를 비난하기도 했다. 그 당당하던 독일이 '동정」을
구하는 처지가 됐다니 국가의 명운도 새옹지마와 다를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