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그때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돌아가신 1971년
그해였던 것 같다. 당시만 해도 유선 스피커방송으로만 뉴스를 들을 수
있었는데 어느 날 방송에서 남북적십자 회담이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통일이 돼야 아버지를 볼 수 있을텐데...』 하시면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도하셨던 어머니는 그날 이후 방송이 시작되는 새벽 5시부터
끝나는 밤 12시까지 좀처럼 스피커 옆에서 떠날 줄 모르셨다.
당시 방직공장에 다니고 있었던 내가 밤일을 마치고 돌아와 잠들기 전에
스피커를 꺼놓으면 어느새 다시 켜놓고 귀를 기울이고 계셨다. 혹시라도
남북간에 통일이 된다는 기쁜 소식을 놓칠세라 귀를 기울이셨던 애처로운
모습이 지금도 사무치도록 생생하다. 결국 어머니는 실망에 실망을
거듭하다 그 해 소원을 못 이루고 돌아가셨다.
우리 집은 평북 피현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서울에 와서 성탄절을
맞을 때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라는 이름이 정답게 떠오른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오늘밤에 하얀 머리 붉은 모자 쓰고서 흰눈을
날리며 오신다』라고 불렀던 예닐곱적 노래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성탄 전날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언니 오빠들과 색색의 초롱불을
들고서 「기쁘다 구주오셨네」를 부르며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발걸음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그 꿈같은 시절은 1947년에 모두 끝나고 말았다. 교회 장로로 일을
보시던 아버지는 북한에서는 신앙생활을 더는 할 수 없게 되자
작은오빠만 데리고 남한으로 가셨다. 그 후 어머니는 연세 드신
시부모님을 모시며 꿋꿋이 살아오셨다. 항상 나를 옆에 앉혀 놓고 꿇어
엎드려 하던 어머니의 이불 속 기도와 찬송은 지금도 귓전을 울린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환난과 핍박중에도
성도는 신앙지켰네』 찬송책은 1947년 이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어머니에게 배운 노래는 언제까지 내 머리 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교회는 문을 닫고 성경과 찬송은 모두 회수당했지만 북녘 땅에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막내딸로서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나와 우리
가족에게도 어머니의 신앙은 그대로 이어졌다. 언제나 온 세상을 향해
크게 찬송을 불러보고 싶지 않으셨을까. 하지만 어머니는 숨막히는
이불속에서도 이른 새벽을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와 찬송으로 여셨다.
어머니의 가장 간절한 기도는 남북통일이었다. 그의 간절한 마음을 내
마음에 담고 남한땅으로 와서 아버지의 묘를 찾아 전해 드렸다.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4년 뒤인 1975년에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이미 새로
가정을 꾸려서 이복동생이 있겠거니 생각했지만 아버지도 어머니만을
그리며 30년 세월을 홀로 지내시다가 떠났다고 했다. 주위의 권유를
한사코 뿌리치고 어머니에 대한 한마음을 지켰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일평생 남북통일을 위해 기도했던
어머니......그분들의 삶 앞에 나는 얼마나 숙연해졌는지 모른다.
( 최영주/ 97년 탈북. 주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