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초, 프랑스에서는 '문호' 빅토르 위고(1802~1885)의 탄생
200주년(2월 26일)을 맞아 교육부가 올해 첫 수업을 교과목과 관계없이
위고의 작품을 읽는 것으로 시작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자크 랑 교육부
장관도 이날 파리의 달랑베르 초등학교를 방문해 학생들에게 1853년에 쓴
서사시 '징벌시집'의 한 구절을 암송해주었다는 소식이다. 나라마다 그
나라 문학을 대표하는 문호를 자랑한다. 가령 영국의 셰익스피어,
독일의 괴테, 이탈리아의 단테, 러시아의 톨스토이가 있다. 그렇다면
프랑스의 문호는? 앙드레 지드의 대답은 의미심장하다. "맙소사! 빅토르
위고지!" 그 미묘한 감탄사 속에는 이 거인에 대한 경의와 동시에
개성을 중요시하는 지드의 국민문학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는 과연 '문호'와 '위인'의 다각적 조건을
골고루 갖춘 예외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그는 어느 한 분야에 치우치지 않은 거대 종합의 표상이었다. 그는
19세기 전체를 전 생애와 전 작품으로 살고 대표했다. '징벌시집',
'관조시집' 등 서정, 풍자, 서사시, '크롬웰', '에르나니' 같은
극작품, '노트르담 드 파리', '레미제라블'같은 소설 등 다양 다수의
작품, 풍요로운 천재성, 거대 상상력, 힘찬 감성은 단연 그를 군중 속의
거인으로 떠오르게 한다. 그는 예술, 사상, 정치에 있어서 자신의 시대와
함께 변모 성장했고 만년에는 공화국의 국민 시인이 되었다.

둘째, 그는 한 인간 속에 '위인'의 두 가지 이미지를 결합했다. 한편,
계몽주의로부터 이어받은 위인의 이미지, 즉 민주주의적 신념에 기초하여
시민으로서,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겸허하게 인류에 헌신 봉사하는
위인의 이미지가 있다. 다른 한편, 나폴레옹으로 표상되는 천재의
이미지가 있다. 즉 밑바닥 군중 속에서 홀로 우뚝 솟아 자신의 의지
하나만으로 세상에 도전하는 고독한 영웅, 그 낭만적 숭배의식에서
생겨난 위인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빅토르 위고는 바로 이 두 가지를 한
몸에 통합, 공화국 이념으로 승화시켰다.

끝으로 그는 괴테나 톨스토이처럼 장수하여 불후의 영예를 살아서
누렸다. 세상의 모든 문호들처럼 일찍부터 무성한 수염에 덮인 초상을
과시했다. 장수한 그는 친근한 할아버지인 동시에 제 2제정과 맞서
싸우는 거인 투사로 인식되었다. 공화국의 승리 이후 모든 학교 교과서는
그를 위인으로 공인했다.

프랑스 국민들에게 그는 '창문 아래로 굽어보는 거인'이었다. 우선,
1870년 9월 5일, 19년 동안의 망명생활에서 파리로 돌아온 그는 파리
북역에 운집하여 "빅토르 위고 만세!"를 연호하는 시민들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말했다. "시민 여러분, 공화국이 되돌아오는 날 나는
돌아오겠다고 나는 말했었습니다. 여기 내가 돌아왔습니다!"

그 후, 1881년 2월 27일. 성급한 제 3공화국은 그의 80세 탄신
기념행사를 한해 앞당겼다. 에트왈 광장에 운집한 60만 군중은 5만 명의
어린이를 앞세워 그의 집을 향해 행진했다. 백발의 빅토르 위고는 자기
집 2층 창가로 나와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1885년 5월 22일, 위고는 83세로 숨을 거두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5만 프랑을 준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영구차에 실려
무덤으로 가기를 원한다. 나는 그 어느 교회의 추도식도 거부한다. 나는
만인을 위한 기도를 원한다. 나는 신을 믿는다"는 유서를 남겼다. 6월
1일 월요일 11시로 국장을 결정한 프랑스 의회는 고인의 뜻에 따라
시인의 영구를 초라한 수레에 실어 5월 31일 일요일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개선문 아치 아래에 안치했다. 샹젤리제를 포함하여 열두 개의 대로를
가득 메운 채 조문의 순서를 기다리는 남녀노소 시민들의 수는 무려
200만! 개선문이 상을 당한 것이다. '제국'의 개선문 궁륭 아래서
하룻밤을 지새운 시인은 가난뱅이의 수레에 실려 위인들만을 모시는
팡테옹 신전으로 직행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과연 문호가 있는가?
우리는 과연 문호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물론 교육부, 문화부 장관에게
던지는 질문은 아니다.

(김화영·고려대학교 불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