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사탕수수밭은 힘든 노동, 형편없는 임금 등 이민 초기 '고생'의
대명사로 통한다. 여름 뙤약볕 아래서 일해야 했고, 당시는 사탕수수
농장 초기여서 돌도 많아 큰 고생을 해야 했다. 감독이 채찍으로
노동자들을 다스렸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다른 주장도 있다. 이민 2세로 사탕수수밭에서도 일했던
정남영씨는 "1주일 일하면 쌀 50㎏ 정도를 살 수 있었고, 어느 정도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돈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당시 노동자에게는
최소한 침실 2개에 부엌과 응접실이 있고 수돗물이 나오는 집이 공짜로
제공됐다. 병원이 공짜였고, 취사나 난방용으로 석유, 장작이 제공됐다.

특히 진주만 기습공격 후 생활이 획기적으로 개선돼, 신청하면 대학
장학금이 나오기도 했다. 예를 들어 정남영씨는 미국 정부 지원을 받아
네브라스카, 미시시피, 뉴욕 등 대학을 3곳이나 졸업할 수 있었다.

농장일이 힘들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민자 중 실제 농부는 15%에
불과했기 때문이란 시각도 있다. 물론 이민서류의 직업란에는 모두
'농업'이라고 기재했다.

이민자들은 3년간 의무적으로 농장에서 일해야 했다. 그 계약조건이 풀린
1906년부터 서서히 이민 1세의 직업이 다양해진다.

현지에서 발간됐던 신한국보 1909년 2월 12일자에는 양복점, 화물회사,
해동여관 광고가 실려있다. 또 1910년 한인회 명부에는 목수, 식료품점,
잡화점, 제조업, 세탁소, 마차 운전, 요리사, 꽃집, 정원사, 기자, 교사,
목사, 한의사 등 다양한 직종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