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국제무역질서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다자간
협상을 원칙으로 하는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이며, 다른 하나는
지역간·국가간 쌍무적 협정 체제이다.
그러나 WTO에 가입해있는 142개국 중 쌍무 무역협정을 체결하지 않은
나라는 일본과 한국 두 나라뿐이다. 한·일 두 나라가 쌍무적 무역협정을
체결하지 않은 것은 그 실익이 그다지 크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WTO체제 창설에도 불구하고
다자주의(multilateralism)보다는 지역주의에 기초한 호혜적
무역자유화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지역주의의 확산으로부터 소외된 한국과 일본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쌍무적 자유무역협정의 체결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예컨대,
일본은 지난 APEC 정상회담에서 기존의 자유무역협정보다 포괄하는
범위가 넓은 경제우호동맹협정을 싱가포르와 체결하기로 합의했다.
농업과 같은 민감 분야가 제외된 불완전한 협정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어쨌든 일본은 한국에 한 발 앞서 쌍무적 무역협정 체제 속에 편입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몇 해 전부터 칠레와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협상은 국내 이익집단의 반발로 미궁에 빠져있는 상태이다. 물론
국내 산업에 큰 영향을 미치는 자유무역협정에서 국내 이익집단의 반발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국가들이 비교적 순조롭게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할 수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다. 그 것은, 자유무역협정의 체결로
인해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경쟁력이 취약한 부문과 집단의
불만과 반발을 민주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무역협정은 의회의 비준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항상
정치인들은 표를 의식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자유무역협정의 체결로부터
기대되는 이익이 큰 만큼 행정부와 의회는 구조조정에 필요한 여러 가지
국내조치를 협상 과정에서 착실히 준비함으로써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게
된다.
칠레와의 협상 과정에서 정부는 농민들의 피해가 예상되는 분야를
배려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왔다. 계절관세의 도입이 그
일례이다. 세계 최대의 포도수출국이기도 한 칠레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면 값싼 칠레산 포도가 수입될 것이고 이로 인한 국내
포도재배농가의 피해는 불가피하다. 따라서 정부는 국내에서 포도가
생산되어 판매되는 기간에는 포도수입에 대해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고,
계절적으로 포도재배가 불가능한 기간에는 관세를 낮추어 농민의 피해를
줄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 번만 더 생각해보면 겨울철에도
비닐하우스에서 포도를 재배하는 국내 농가는 칠레산 포도 수입으로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우리 측이 농산물에 대해 많은 예외조치를 요구하면 할수록 칠레측은
우리 공산품에 대한 관세인하에 인색해질 것이다. 그 결과
자유무역협정의 체결로부터 기대되는 이익도 줄어들 수밖에 없어진다.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 협상은 우리나라가 앞으로 다른 국가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선례가 될 것이다. 정부가
우리와 지구 정반대에 위치한 칠레와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한 배경에는
칠레가 중남미 시장의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있다. 또 지리적으로 멀리 위치한 칠레와 협정을 맺으면 그만큼 국내
농가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우리의 입장만 내세우면 협상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치열한 글로벌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싫든 좋든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제휴 파트너를 확보해야 한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대칠레 자유무역협정의 꼬인 매듭을 푸는 데 정부 여당이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때이다.
( 대외경제정책연구원·국제거시금융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