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때 호조(戶曹)서리에 김수팽(金壽彭)이라는 이가 있었다.
어느 날 선혜청 관리로 있는 동생 집에 들렀다. 물감인
남(藍)항아리들이 뜰에 있음을 보고 어디에 쓰려는 거냐고 물었다.
동생의 아내가 물감들여 살림에 보탠다 하자 그 남을 모두
쏟아버리면서 말했다. 우리 형제가 더불어 나라의 녹을 먹으면서
이런 것으로 영업을 하면 백성들은 뭣으로 생업을 삼는다는
말이냐고 —.

조그마한 부업마저도 동생에게 하지 못하게 했던 공직풍토였다.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더라도 벼슬 자리에 나가면 그동안은
이별한 셈 쳐야 한다고 '목민심서 '는 적고 있다. 그리고
벼슬하는 아우집에 찾가가는 형을 속된 말로 관백(官伯)이라
비꼰다 했다. 청탁으로 이권이나 불법을 노릴 것이 뻔하니
권력이 임금 위에 있는 왜국의 관백(關白)을 빗댄 것이라 했다.
수령으로 나갈 때 처자식은 고향에 두고 가는 것이 법도이며
아들이나 형제가 찾아오면 관가의 정문으로 들이지 못하고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곁문으로 허리 굽혀 들여야 한다.

바쁜 일로 굳이 낮에 들라면 담장을 헐어 들게 했으니 이를
파장문(破檣門)이라 했다. 형제 사이의 부정 거래에 그토록
민감했던 조상들이었다.

임금님의 동기간을 통한 권력 누수를 막기 위한 관행도 대단했다.
조선조 2대 임금인 정종은 열다섯이나 되는 아들 모두를
머리 깎이고 탈속시켜 절에 들여보내 누수를 사전에 차단했다.
세종대왕이 즉위하자 맏형인 양녕대군이 실성한 척했음이며,
둘째 형인 효령대군이 절에 들어간 것도 바로 이 형제간의
누수 파이프를 단절하는 현명한 배경이 깔린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임금의 형제는 먹고 살수 있게 해주는 대신 일체 벼슬에서 배제하고
소외시켰다.

일반 벼슬아치도 상피(相避)라하여 형제가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벼슬자리나 고을에 발령이 나면 이를 마다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부패는 동기간으로부터 시작되기에 이렇게 원천차단을
했던 것이다. 지금 고위공직자들의 권력누수로 국민의 신뢰를
주워담을 그릇 깨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는데, 그 누수의혹이
가장 가까운 지친인 동생에게 쏠리고 있어 주의를 끌게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빙상의 일각이 드러난 것일 뿐일 게다.

( kyoutaelee@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