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이후 국정이 간 곳 없다. 정치도 경제도 우리네
살아가는 모습도 신문에서 방송에서 몽땅 사라져버렸다. 사무실에서도
술자리에서도 온통 21세기의 첫 전쟁에 관한 얘기들이다. 그럴 만하다.
하지만 모든 국민의 눈과 귀가 뉴욕과 워싱턴으로 쏠렸다고 해서 우리
내부의 문제점이 해결되거나 개선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곪아터진
채 방치되고 있을 뿐이다.

경기침체 국면에 있는 경제의 불확실성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더욱
증폭되고 있다. 하이닉스반도체에 대한 구제 금융, 대우자동차
매각이라는, 한국 경제를 짓누르는 악재들도 여전히 해결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세계 IT(정보기술)산업의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한국경제를 덮은 먹구름은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의 관심사는 한국 경제가 이 침체 국면을 얼마나 빨리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 큰 관심은, 설령 정부의
경기부양책으로 침체를 벗어난다 하더라도 우리 경제가 지속적인 성장의
길로 복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런 의구심은 현 정부가 정부와 시장, 정치와 경제를 묶는 21세기
한국형 시스템을 구축하는 구조조정에 명백히 실패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 발전, 생산적 복지 실현'을 내건
DJ정부의 개혁은 상충되는 목표들을 달성할 수 있는 전략도, 정권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정치적 과단성도 없었다. 평등을 본질로 삼는
민주주의와 결과의 불평등을 추구하는 시장경제 사이에는 본질적인
갈등이 존재함을 DJ정부는 무시했다. 선진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이 오랜
시행착오와 혼란, 토론과 학습과정을 통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충돌에서 오는 갈등을 해소하는 제 나름대로의 시스템을 구축했건만,
'글로벌 스탠더드'란 구호 속에 외국제도의 이식에만 집착했다. 예를
들어 정부·금융·재벌의 유착에 의한 성장모델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해서 과거를 모조리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또 구조조정에 대한 정부의 이중적 태도는 정책의 신인도를 결정적으로
떨어뜨렸다. 경제불안의 원천인 대우, 현대의 부실처리에 있어
구조조정의 대원칙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시장원리와 민간 자율 원칙이 무시된 빅딜(대규모 사업교환)의 산물인
하이닉스반도체의 몰락은 또 다른 초대형 부실을 예고하고 있다. 정치적
명분론에 떠밀려 대우자동차 등 주요 부실기업들의 매각이 지연되면서
그들의 이자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경제의 고비용, 저효율 구조의 표본인 공공 부문 개혁은
계속 방치되고 있다. 이 정부의 공공개혁은 거창한 목표만 앞세웠지
실질적인 성과는 거의 없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지금처럼 정부가
정치논리에 묶여 손놓고 있어서는 곤란하다. 정부는 무엇보다 더 이상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 발전'이란 명분론에만 집착해선 안 된다.
내년 대선까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미 노출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총력을 집중해야 한다. 이 정부가 임기 내에 마무리지어야 할 최우선
과제는 대우자동차 매각과 대우·현대 부실의 처리이다. 물론 처리는
철저히 경제논리를 따라야 한다. 기아와 한보의 부실처리 지연이 1997년
외환위기를 촉발했음을 명심해야 한다.

DJ개혁은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유리한 주변 여건과 여론의 지지를
받으며 시작됐다. 그런데도 이 정부는 과거 정권이 범한 오류, 즉 개혁
청사진의 부족과 전략 부재, 정치적 결단의 부족, 잘못된 우선순위 설정
등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고들 말한다. DJ 정부는 왜 자신의 평가와 시장의
평가가 이토록 차이가 나는지 곱씹어 보아야 한다. 남은 임기 동안 이
정부의 구조조정이 시장의 눈높이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 이화여대 교수·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