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탄한 비평이론을 구축하고 있는 국문학의 고미숙박사(42)와 사회학의
이진경박사(38)가 이끌고 있는 젊은 학자들의 연구모임
'수유연구소+연구공간 너머'에서 또 한 명의 주목할 만한 필자가
탄생했다.
3월에 로버트 솔로몬 외 지음 '한권으로 읽는 니체'(푸른숲) 번역,
6월에 칼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그린비) 번역에 이어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소명출판)을 쓴 고병권(31)씨.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사회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경력으로 니체에 관한 책을 썼다는 게 우선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마르크스를 공부하기 위해 사회학으로 전과를 했는데 우연히
니체의 '도덕 계보학'을 읽고 방향을 틀었습니다."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 프랑스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걸었던 길과 비슷하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난해하다는 평을 듣는 니체철학을 상당히 잘 소화한
데는 "들뢰즈의 도움이 컸다"고 했다.
니체의 사유방식, 니체에 이르는 길, 니체철학의 현대정치적 의미 등을
두루 다루면서 멀게만 느껴지는 광기의 철학자 니체를 바로 우리 옆에다
확 끌어다 놓았다.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대상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근대라는 서구의 한 시대가 만들어놓은 협소화, 체계화, 독단화의 경향을
조롱하고 야유하고 비웃었던 니체에게서 고씨는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근대의 각종 신념들이 실은 전혀 단단하지 않다"는 가르침을
배웠다고 했다. 제목 '천 개의 눈 천개의 길'은 그만큼 세상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고씨는 니체를 자유주의자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실은
자유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채 자유주의자에 이르는 길로 니체가
사랑받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관점에서 고씨의 책을 읽어야 할 것같다.
그렇지만 고씨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지 모른다. 니체철학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독제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냐는 물음에 "나에겐
강장제다"라고 답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