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쯤 지났을까. 퇴근길 인파로 북적대던 파리의 지하철 통로 끝
플랫폼 쪽에서 첼로 소리가 들려왔다. 비틀스의 '예스터데이'였다.
아름다운 선율에 이끌려 나는 서둘러 플랫폼 쪽으로 뛰어갔다. 연주자는
하얀 턱수염이 성성한 백발의 노인이었다. 남루한 차림이었지만 그는
더없이 평안한 웃음을 띤 채 연주에 몰두했다. 서너살쯤 돼보이는 꼬마가
연주자 옆으로 다가갔다. 꼬마와 연주자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그들
사이에 말없이 오고간 그 무엇이 나의 가슴을 관통했다.

마침 열차가 들어왔다. 열차가 떠나면 관객들도 떠나고 연주자는
외로워질텐데. 하지만 기우였다. 플랫폼의 관객들은 열차에 오르지
않았고, 열차는 빈 채로 떠났다. 연주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연주가 마무리되자, 그들은 연주자에게 박수와 환호로 감사를 표했다.

금년 여름 서울의 지하철에서 그 때의 박수와 환호를 다시 발견했다.
남미에서 온 연주자들이 지친 시민들에게 그들의 소리를 들려주고
있었다. 무뚝뚝한 모습으로 지나가던 회사원들도, 바쁜 걸음으로
데이트가던 학생들도, 시장에 다녀오던 주부들도 연주에 이끌려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구슬픈 가락이 기타 반주와 함께 신명나게 흘러나오자
주위에 있던 모든 이들은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그 즉석 음악회에
동참했다.

연주가 끝난 후 지하철 안. 문득 영화 '쇼생크탈출'에서 감옥에서
울려퍼지던 모차르트의 선율과 그 아름다움에 모자를 벗어 경의와 감동을
표하던 배우 모건 프리만의 모습이 떠올랐다. 삶에 지친 플랫폼의
관객들이 선사받은 것은 음악이 아니라 바로 '희망'이 아닐었을까.

( 최항섭·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상임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