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이 폭군(暴君)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의 음성은 산개와 같고
자비스러운 마음씨가 없었다. 자기가 아쉬울 때에는 굽실거리며
겸손하지만 뜻을 이루고 나면 남을 업신여기고 사람을 잡아먹는다."
이렇게 사기(史記)에는 적혀있다. 그는 사상통일을 위한다면서 460명이나
되는 유자(儒者)들을 생매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도량형(度量衡)이며
화폐, 문자를 통일시키고 전국의 도로망을 정비하고 지방행정제도를
확립시킨 그는 중국역사상 드물게 보는 통치자였다.
절대적인 권력자는 흔히 독선(獨善)에 흐르고 남의 말을 듣지 않게
된다. 그러나 진시황은 남의 의견을 잘 들었다. 그가 신하들의 제안을
따라 다른 나라 사람들을 모두 국외로 추방하는 법령을 발표하려
한 적이 있다. 이때 이사(李斯)가 반대의견을 펴자 그는 주저없이
법령을 철회했다. 황제가 된 다음에도 신하들을 격의없이 대하고
음식이며 의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또 큰일이나 작은 일이나
모두 자기가 챙기고 매일 자기가 결재할 업무량을 정하며 그것을
다 끝낼 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몸을 사리지 않고
국사에 힘썼다.
그는 또 거의 해마다 지방 순수(巡狩)를 했다. 원래가 수(狩)란 사냥을
뜻했다. 그리고 왕이 사냥을 한다는 것은 일종의 군사훈련과 같았다.
말하자면 군사훈련을 겸해서 자기의 무력을 과시하기 위해 지방을
돌아본 것이다. 진시황의 순수는 평균 3개월 이상이 걸리는 긴 여행이었으며
도중에 암살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순수를 중단하지 않았다.
순수에 민정시찰이라는 또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 순수를
못하는 해에는 변장을 하고 수도 함양(咸陽)시내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도적들에게 봉변당한 적도 있었다. 그는 순수를 할 때마다 반드시
그 고장의 명산(名山)에 올라서 천하의 안녕을 기원하는 한편 거대한
비석을 세웠다. 그것은 역사에 자기 이름을 남기려는 허영이랄까
명예욕의 표현이었다. 그의 마지막 순수는 산둥성 끝에 이르는 것이었으나
과로에 쓰러져 객사를 했다.
이처럼 국사(國事)에 헌신한 진시황이었지만 불로장생(不老長生)이라는
엄청난 망상(妄想)에 사로잡힌 다음부터 정치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
통치자가 권력에 도취되면 권력을 오래도록 누리기 위해 오래 살고
싶어진다. 이런 심리를 교묘히 이용한 방사(方士), 도사(道士)들에게
진시황도 놀아난 것이다. 서시(徐市)라는 방사는 바다 건너 선인(仙人)이
살고 있는 섬에 가서 불로의 영약을 얻어오겠다고 진시황을 꾀었다.
이런 황당한 얘기에 홀린 진시황은 남녀 어린이 수천명을 그에게
딸려보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측근들은 충언을 하기는 커녕 오히려
모두가 앞을 다투어가며 용하다는 이 도사, 저 방사들을 소개하기에
급급했다. 망상이 도지면 집념이 되고 이어 독선에 빠지며 시야(視野)가
비뚤어지고 끝내는 사리 판단력을 잃게 되는 법이다.
그리하여 진시황은 자나 깨나 불로의 영약 찾기에만 골몰하고
방사들에게 끌려다녔다. 그가 그처럼이나 힘들여 이룩한 천하통일이
오래가지 못하고 아들의 대에 어이없이 붕괴된 원인 중의 하나는
여기 있었다.
또 하나의 원인은 그가 힘에만 의지한 정치를 했다는 데 있었다.
힘은 민심을 누를 수는 있어도 힘만으로 민심을 움직이게 하지는
못한다.
물론 힘으로 민심을 잠재울 수도 있다. 눈가림으로 민심을 현혹시킬
수도 있다. 또는 힘으로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려서 민심의 소리를
죽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 잠시뿐이다. 언제까지나 힘으로 민심을
누르지는 못하는 것이다. 항우(項羽)가 시황의 옛 궁전들을 모조리
불질렀을 때 진나라 백성은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