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장관을 지낸 한 고위인사가 초야에 묻혀 시골 초등학교 교장으로 백년대계를 위해 백의종군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축구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대표팀 감독을 지낸 허정무씨(46)-.

국가대표 감독시절 한국을 대표한다는 선수들이 어린 시절 맨땅에서 공을 차며 몸에 밴 나쁜 습관을 고치지 못해 고민했던 허감독이 용인축구센터의 총감독을 맡아 한국 축구의 백년대계의 씨를 뿌리고 있다.

지도자로서는 최정상이라 할 수 있는 대표팀 감독에서 아직 설익은 중고생들을 맡아 가르치는 유소년 지도자를 결심하게 된 것은 어쩌면 '백의종군'이랄 수도 있는 파격. 더구나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프로축구 갑A리그 여러팀들로부터 숱한 감독직 제의를 받고 있는 입장에선 좀처럼 결심하기 힘든 일이다.

지난 23일 용인대우연수원에서 유소년 선수들을 테스트하고 있던 허감독이 꿈꾸는 한국 축구의 미래와 그가 왜 이 '가시밭길'을 선택했는 지 얘기를 들어봤다.

-프로팀 감독을 마다하고 용인축구센터의 총감독직을 맡은 배경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지금은 잘해야 된다는 부담감을 느낀다. 한국 축구에 가장 필요한 유소년 축구의 터전을 용인시가 큰 결단을 내려 마련해 준 것이 고마울 뿐이다. 처음 시작하는 일이고 다른 곳보다 관심이 많은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상황들이 내가 잘못하면 다른 유소년 축구학교들이 생길 기회가 없어지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어 조심스럽다.

-남해와 함안에도 유소년 축구학교가 생겼다. 그곳과 차별화는 가능한가.

▲용인축구센터는 교육생을 테스트를 통해 뽑는다. 엘리트 양성 프로그램 위주로 가는 것이다. 이 점은 다른 축구학교가 신청자들을 모두 받는 것과 다르다. 재질있는 선수들을 선발해 지속적으로 훈련시켜 한국 축구발전에 일조할 수 있는 인재로 키우고 싶다.

-그동안 척박하다고 할 수 있었던 한국 유소년 축구에 처음으로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이다.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 것으로 보는가.

▲약 3∼4년후로 생각하고 있다. 내년에 중학교와 고등학교 1학년에 진학하는 선수들을 선발하고 있다. 이들이 3∼4년후면 국가대표급은 되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선수로 두각을 나타내는 단계에 오를 것이다. 이는 한국 축구의 전체적인 선수층이 두터워진다는 의미가 된다.

사실 프랑스는 83년부터 유소년축구 양성에 계획을 세우기 시작해 8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우승했으니 결국 13년이 걸려서 앙리, 아넬카 등을 길러낸 셈이다. 그러므로 3∼4년후에 어느정도 성과를 거둔다면 열악한 우리 실정에서는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머지않아 이 곳에서 '한국판 앙리'가 탄생하리라 믿는다.

-최근 유소년 선수들이 브라질로 축구유학을 많이 떠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바람직한 일이다. 일본 역시 80년대 후반 브라질, 아르헨티나로 많은 유망주들이 유학을 떠났고 J리그 출범이후 클럽시스템을 구축해 국내에서도 유망주를 길렀다. 그러한 인적, 물적 투자가 있었기 때문에 최근 일본 축구가 탄탄한 선수층을 기반으로 강세를 보이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우리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허감독 개인으로 봐서는 국가대표팀 감독에서 유소년 지도자로 자리를 옮겼으니 '백의종군'이랄 수도 있겠다.

▲솔직히 그렇다. 그러나 최근 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축구를 위해서는 누군가 해야할 일이지 않는가. 이 학교가 어느정도 뿌리를 내릴 때 까지 성심성의를 다할 작정이다. 그런 후에는 다른 사람이 맡아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고 내가 직접 관여하지 않고 옆에서 도와주는 정도로도 충분할 것 같다.

-프로 감독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의견이 축구계에서 나오고 있다.

▲프로와 유소년 모두 중요한 일이다. 어떻게 보면 나에게는 이것도 중요한 기회고 이런 기회를 준 용인시에 감사하고 있다. 때가 되면 프로로 복귀해 다시 도전하는 삶을 살고 싶다.

-용인축구센터를 시작하면서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

▲한국 축구의 환경을 조금이라도 개선했으면 한다. 우리 선수들은 적어도 아시아권에서는 그 어느 국가보다 재질이 우수하다. 다만 환경때문에 세계의 벽 앞에서 자꾸 무너지는 것이다. 환경만 개선된다면 타고난 재질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부터 배워야 할 기술을 프로에 와서 배우고 그나마 중요한 것들은 은퇴할 때나 되서 깨닫는 현실이 너무 가슴아프다.

〈스포츠조선 추연구 기자 pot09@〉

◆허정무 총감독 프로필

▲생년월일=1955년 1월13일

▲출신지=전남 진도

▲출신교=서울영등포공고(71~73년)-연세대(74~77년)

▲선수경력=한전(78년)-해군(87~80년)-네덜란드 필립스 아인트호벤(80~83년)-현대(84~86년)

▲대표경력=청소년대표(73년) 국가대표(74~80년, 84~86년) 월드컵대표(86년)

▲지도자 경력=이탈리아 월드컵 한국대표팀 트레이너(90년) 미국 월드컵 한국대표팀 코치(94년) 포항 아톰스 코치(91~92년) 포항 아톰스 감독(93~95년) 전남 드래곤즈 감독(96~98년) 국가대표감독(98~2000년) 올림픽대표 감독(99~2000년)

▲성적=FA컵우승(9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