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8·15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한 남측 대표단 중 상당수가 방북 전 정부와 한 약속을 어기고 15일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통일탑)에서 열린 개막식과 16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야회에 참석한 사태는, 북에 놀아나고 있는 대북정책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북측은 이번에 ‘통일탑 주변에서의 일체 행사에 참석지 않겠다’는 남측 대표단의 의사를 무시하고 행사에 참석하도록 집요하게 요구했으며, 이에 남측 대표단은 참석파와 불참파로 갈리는 내분 양상을 겪었다.

우리 정부는 북한의 고려연방제 등을 상징하는 통일탑에서의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을 지지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 이를 허용치 않았다. 그러나 이런 우리 정부의 입장과, 남측대표단의 ‘통일탑 행사’ 참석이 우리 정부를 곤경에 처하게 할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을 북한은, 이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강공으로 밀어붙였다.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깔린 계산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북한의 통일방안 선전에 남한 민간세력들을 동참시키려는 옛 전술을 노골화한 것으로 보인다. 북측의 의도는 이번 행사를 위한 남북 실무접촉 과정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북측은 이번 행사의 취지가 ‘6·15 공동선언 실천’에 있음에도 서울과 평양에서 공동으로 갖자는 남측의 제안을 거부, 평양 행사만을 고집했고, 우리 측이 기피해온 통일탑에서 공동으로 개·폐막식을 갖자고 주장했다.

이에 우리 정부가 남측 대표단의 방북을 불허하자, 북측은 “개·폐막식 행사는 우리 단독으로 하겠다”고 한발 물러서는 제스처를 취했다. 우리 정부는 이를 믿고 민화협과 7대 종단, 통일연대 등 세 단체 관계자 300여명으로 구성된 남측 대표단의 방북을 ‘통일탑 행사 불참’을 조건으로 승인했으나, 북측은 미리 평양시민들을 대기시켜놓고 있다가 대표단이 평양에 도착하자 ‘통일탑 행사’ 참석을 종용했다.

북측이 남측에 대해 안면몰수로 나오는 것은 이번 행사기간 내내 자주와 외세배격을 강조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남북 간의 신뢰회복이나 교류협력 증진보다는 ‘통일문제의 자주적인 해결’ ‘주한미군 철수’ 등 정치적 구호를 앞세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사태는 북한이 앞으로 남북관계를 쉽게 발전시킬 생각이 없음을 명확히 내비친 것이기도 하다.

북측의 이런 의도를 어느 정도 감지했으면서도 막판에 남측 대표단의 방북을 조건부로 승인한 우리 정부도 북한에 끌려 다닌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정부가 북측의 의도를 감지했다는 것은 당초 ‘통일탑 행사 참석 불가’라는 완강한 입장을 보인데서 잘 나타난다. 결국 당국간 대화가 중단된 상황에서 민간교류라도 끊어지면 안 된다는 현 정부의 조바심이 이런 어이없는 사태를 연출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