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부 호출로 경무국에 다녀온 조선일보 출판부 주간 노산(이은상)은
사장 계초(방응모)에게 "정 안되면 우리가 신문사를 그만두면 그만
아닙니까" 하면서 흥분했다. 단 둘이 점심을 들던 자리였다. 계초는
노산의 말에 놀라기는커녕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던 동작에도 머뭇거림이
없었다. "생각은 노산과 같은데 사원들의 밥줄을 쥐고 있어서…."
계초는 말끝을 흐렸다.
중국을 침략한 일제는 1937년 초부터 언론탄압의 강도를 높였을 뿐
아니라 제작에까지 깊이 관여했다. 1면에 천황 부처의 사진 게재를
강요하고 심지어 사설까지 써 가지고 와서 배포했다. 이런 사실은 당시
발행되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1면의 편집이나
내용이 거의 같아 입증되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경무국을 시켜 '편집에 관한 희망 및 주의사항'이라는
지시문서를 각 신문사에 배포하여 활자의 오식까지 문제를 삼았다.
용어도 지정하여 일군은 황군으로 표기토록 강요했다. 이런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민간지들은 특집을 통해 조선민족 이야기와 언어, 한글, 문화
지키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총독부는 지시사항을 교묘히 빠져나가는
두 신문을 그냥 둘 수 없었던지 '매일''동아''조선'을 하나의
신문으로 통합토록 강요했다.
1940년 1월 15일 총독부 경무국장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와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정세가 언론통제를 불가피하게
만들고 있으며 또 용지 사정도 어려워지고 있어 후방의 전시보국체제를
일원화할 필요가 있어 언론보국의 기관을 하나로 묶을 방침을 세웠다"면서
그들의 기원절(일본건국기념일)인 2월 11일까지 자진 폐간토록 강요했다.
'조선''동아'두 민간지는 총독부의 강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사장은 운명을 같이하기로 약조를 하고 버티기 시작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1940년 8월 10일 폐간을 강제하는 명령을 내렸고, 두 민간지는 도리없이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런데 집권당 기관지인 민주당보는 "조선·동아가
총독부와 타협하여 자진폐간했다"고 왜곡하고 있다. 두 신문을
친일·친미로 모는 집권당의 의도는 반일·반미에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