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온통 평등주의자들이다. 의료 혜택도 교육도 언론도 "모두 다
'평등하게' 누리고 모두 다 '평등하게' 배우고 잘 살자"고 한다.
학생과 학교를 모두 닮은꼴로 만드는 교육평준화 정책, 부유층의
부담으로 서민층의 복지를 지원하는 건강보험제도, 메이저 신문사의
경쟁을 제한하는 데 초점을 맞춘 신문고시제도.

이런 주장의 핵심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뒤에 처지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이를 위해 앞서가는 사람들은 유대감과 형제애로써
참고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용어도 '듣기 좋은 말'은 모두 골라
쓴다. 형제애, 동지애, 평등, 정의, 개혁. 정말 듣기 좋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것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고 찬성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국내만이 아니다.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200여명의 사상자를 낸 반세계화
시위도 결국은 이 같은 평등주의에 바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세상은 과연 가능한가. 인류 역사는 이런 이상을 실현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증명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20세기에
태어났다가 소멸된 사회주의 실험이 바로 그 증거이다.

그런 '역사의 실험'을 끝낸 지 10여년이 지난 21세기의 초엽에 아직도
이 같은 논란이 그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화적인 평등주의, 정치
사회학적인 사회주의 또는 좌파적 이념이나 목표는 역사적 사명이요
진보이고, 이에 반대하는 모든 것은 반역사적이고 수구라는
식의 이분법에 왜 솔깃해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좌파 이념이 원래 인간의 이성보다는 원초적 본능에 호소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수렵채취를 통해 살아가던 원시부족
사회에서는 그 구성원들이 모두 원초적 본능의 소산인 유대감과
형제애로써 서로 도우면서 살았다. 뒤처지는 구성원들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고 온정적이었다. 사적 소유의 개념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고, 구성원들은 모두 개인보다 조직을 중시하는 집단주의자였다.
원시사회에서는 유대감과 형제애와 같은 도덕을 무시하는 구성원, 의견이
다르거나 그룹이 추구하는 목적을 비판하는 구성원은 가혹한 처벌과
증오의 표적이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프다는 질투심과 이에 대한
공포심도 원시사회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강제력이었다. 그들은 다른
부족들을 적으로 취급하고 이들과 고립하여 살았다.

그러나 인간이 평등을 근간으로 하는 '본능적 도덕' 속에서 살아 온
기간은 아주 길었던 반면 불평등을 불가피한 원리로 한 시장경제 속에 산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인류 역사를 하루 24시간에 비유한다면
23시간57분 동안 폐쇄된 원시사회의 본능을 바탕으로 살아왔으며,
시장경제 속에서 산 것은 3~4분에 불과하다고 할까.

오랜 기간 동안 호모사피엔스의 신경구조와 본능적 소망이 형성되었고 이
원초적 본능은 유전적으로 전달돼 현대인의 마음 속에도 깊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평등주의는 결국 현대인에게 내재한
이 같은 원초적 본능을 자극해 세를 늘리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은
도덕적이고, 자유주의자들은 부도덕하다는 평가를 하고 또 이런 평가가
인정되는 것도 이런 감정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점은 유대감·형제애 같은 원초적
도덕심은 가족이나 원시사회와 같은 소규모 그룹을 유지하는 데 적용되는
것이지,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사회에는 결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원시적 도덕률을 현대의 '거대한 열린 사회'에 무리하게
적용하려 한다면 그것이 옳은 것일까.

그 결과는 순간적으로 일부 계층에 득이 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불행과 고통을 안겨준다는 것을 역사는 입증하고
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 강원대 교수·경제무역학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