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변협이 정부의 개혁정책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지난 23일
서울에서 열린 '법의 지배를 위한 변호사 대회'에서 채택한 결의문을
통해서였다. 변호사들이 결의문에서 주장한 요지는 '절차적 정의는
무시되고 실질적 법치주의도 후퇴했다'는 것이다.

양극단의 목청만 높은 가운데 고비마다 우리 사회의 균형추 역할을
자임해 왔던 대한변협의 이런 지적에는 법치주의라는 관점 이상의 경청할
만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음이 분명하다. 이 나라는 지금 심하게 동요하고
있다. 바른 항로를 찾기 위한 안간힘 때문이 아니다. 고물과
이물로 갈라서서 맞은편을 향해 토해내는 편가름의 적의가 배를
두동강으로 낼 지경이다. 적대적 분열의 골은 변증법적 통합이라는 말을
공허하게 하면서 나라의 중심을 흔들고 있다.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면서 해묵은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화해와 통합의
마당에서 새 천년의 거대한 도전에 다시 한 번 굳은 용전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그러나 그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이 정부에서도 지난 정부의
인치논쟁이 제왕적 대통령 논란의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다.
민주화시대의 반민주·반법치 논쟁은 개혁과 반개혁 논란과 맞물려
나라를 요동치게 하고 있고, 이 시국혼란의 근저에 그러한 변형된
인치논쟁이 자리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재야법조인들로 하여금
법치주의의 잣대로 비판에 나서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정부는 소수정권의 한계를 멍에처럼 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다수일 수도 있는 정치적 반대자를 설득하여 개혁에 동참시키는 일은
필요불가결한 정치과정이어야 한다. 개혁의 내용과 방법을 수정하는 한이
있더라도 정치적 반대자들을 설득하여 함께하는 개혁으로 가려는 더딘
길을 택하기엔 지쳤기 때문일까. 비판과 반대는 곧 반개혁이라는 기민한
단정을 목격하는 일에 우리는 더 익숙해 있다.

남북문제나 최근의 언론문제만 해도 그렇다. 북에 대한 개혁·개방
설득노력에 비해 남쪽 내에서의 이견해소 노력이 그 갈등의 진폭에
비추어 부족하였다. 언론사 지배구조문제, 편집권의 독립이 개혁의
핵심이었다면 먼저 자율적 개혁의 끈질긴 모색과 함께 헌법 안에서
관련법제의 개정을 통해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바른 수순이었다. 그러나
행정권을 통한 세무조사, 공정거래 조사라는 손쉬운 방법이 앞섰다.

그렇게 함으로써 도덕성이 훼손되고 그로 인해 개혁에 묵종케 하리라는
우회적 수단으로 어떻게 승복하는 개혁을 이룰 것인가. 저의를 의심하고
의도를 캐내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느닷없는 홍위병 논란도 연장선상에 있다. 설득노력을 생략해 버리고
싶은 집권자의 욕구와 나름의 개혁에 목마른 시민단체의 요구가 우연이든
아니든 결합된 모습으로 나타난 데 대한 신랄한 직유가
아니겠는가. 순수한 의지와 상관없이 시민운동이 정치권, 특히
집권세력의 행보와 겹쳐보일 때에는 정치적 반대자에 의한 오해가 무섭게
증폭된다는 사실을 요즘처럼 절감한 적도 없다.

아직도 깊은 내상들이 다 아물지 않았고 여기저기 피멍들도 많이
보인다. 그러나 오늘을 있게 한 이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소중한 우리의
자산이다. 애정과 관용이 결핍된 비판과 부정은 생산적 대안도, 보다 큰
긍정도 창조하지 못한다. 개혁도 없고 진보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물며
개혁과 진보를 독점하고 그를 통해 권력의 독점까지도 연장하겠다면 어찌
저항이 없겠는가. 지금이야말로 모두 초심으로 돌아가 원칙과 정도와
규범의 의미를 새삼 되새겨볼 때이다.

( 변호사·전 대한변협 공보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