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바꾼 부드러운 힘'. 위싱턴포스트지를 미국의 대표적 정론지로
이끈 캐서린 그레이엄 회장이 17일 타계, 온 미국이 그녀를 애도하고
있다. 고인은 미국의 언론을 바꿨고 더 나아가 미국의 정치와 역사를
바꾼 인물이다.

그레이엄 여사는 항상 온화한 미소를 지었지만, 불의에 대해서는 절대
굽히지 않는 강인한 언론인의 사명의식과 추진력으로 미국의 부패한
정치를 바꿨고, 언론사 사주는 어떠해야 하는지의 진정한 역할모델을
창출했다. 변화의 원천은 강함이 아니라 부드러움이었다.

워싱턴포스트를 반석 위에 올린 보도들, 71년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다룬 국방부 기밀문서(펜타곤 페이퍼) 폭로나 74년 닉슨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그레이엄 여사가 없었다면 그
숱한 위협과 협박을 이겨내고 보도할 수 있었을까? 언론사의 울타리로서
흔들리지 않는 올곧음으로 온갖 압력을 이겨내는 진정한 언론사 사주의
모습을 아들에게 보여주고 가르치려했던 어머니로서의 부드럽지만 강인한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권력에 맞서 독립 언론의 위상을 지켜내고 국민의 알권리를 신장시킨
그레이엄 여사는 바로 미국의 역사를 바꾼 인물이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그레이엄 여사를 애도하며 "캐서린은 냉철하지만 부끄럼이
많고, 강하지만 교만하지 않은 여성이었다"라고 말한 대목에서 그
인품을 엿볼 수 있다.

그레이엄 여사는 언론기업의 신경영전략을 선보인 뛰어난
경영인이기도 했다. '신문이 생존하고 나서야 공익도 있다'는 고인의
경영철학은 디지털 다매체의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언론사가 추구해야
할 경영가치를 잘 제시해주고 있다. 언론의 공익적 정치사회적 기능만을
지고의 가치로 알고 있는 우리에게, 언론도 하나의 비즈니스라는 사실을
깨우쳐주고 실천한 그의 경영수완은 우리 언론기업 사주들이 시급히
배워야 할 귀감이다.

경영적 토대가 구축되어야 언론의 독립도 보장되는 것이고, 기자의
신명난 취재활동으로 좋은 기사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레이엄
여사는 가르쳐주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63년 매출액이 8400만달러에
불과한 일개 지방지였다. 그러나 30년 후인 93년 그레이엄 여사가 아들
도널드에게 경영권을 넘겨줄 때는 매출액이 14억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워싱턴포스트 외에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 인터내셔널 헤럴드트리뷴,
다수의 지상파 TV방송사과 케이블TV 그리고 인터넷방송사까지 끊임없는
사업다각화를 했다. 부채에 허덕이고 있는 대부분의 우리 언론기업들에게
재정의 독립이 있어야 언론의 자유가 있음을 입증해주는 실천적 사례다.

언론사 세무조사 이후 언론개혁이냐 언론탄압이냐의 논쟁 속에서 갈피를
못잡고 흔들리고 있는 우리의 언론 현실 속에서 '한국을 바꾸는
부드러운 힘'의 언론사주를 기다리게 된다. 요즘 이른바 언론개혁을
주장하는 일부의 표현을 빌자면 그레이엄 여사 역시 '족벌신문 사주'인
셈이다.

우리는 요즘 한국언론 역사상 아마도 가장 치열한 권력과 언론간의
긴장관계를 지켜보고 있다. 어쩌다가 '사주같은 놈'이 심한 욕이 된
사회다. 국내 유력지의 사주 부인이 참다못해 자살까지 했다. 어쩌면
몇몇 사주가 구속되는 형국이 올지도 모르겠다. 결국에는 '비판없는
한국 언론'이라는 참담한 상황이 올지 모르겠다. 이런 우리의 언론
형국을 '사주' 그레이엄 여사가 보고 있다면 어떤 충고를 했을까?

어떠한 외압속에서도 진실의 힘을 믿기에 결코 권력에 굴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으며 당당하게 이겨나간 사주 그레이엄 여사의 용기와 배짱이
오늘 우리의 언론 현실속에서 더 커 보인다.

( 숙명여대 교수·언론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