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34·가명)씨는 대기업 과장인 남편과 딸 둘을 둔 주부.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듯이 보이는 그녀는 1년 전쯤부터
특이한 생각을 가끔 하기 시작했다.
집안 일을 제대로 못할 뿐 아니라 남편과 아이들을 잘 챙기기 못하는
자신이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며, '차라리 내가 없어지는 게 가족들에게
더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이었다. 3개월 전부터는 뭘 해도 즐겁지 않고,
늘 피로하고 우울했다.
김씨는 우울증 증상이 있어 약을 먹었지만, 재발이 잘 되자 약을 먹어도
소용없다고 판단해 약을 끊은 상태였다.
세브란스병원 우울증클리닉 전우택(정신과) 교수를 찾은 김씨는 우울증이
재발했다는 진단과 함께 약만으로 치료되지 않는 경우가 흔하므로,
'대인관계 정신치료'를 받아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전 교수로부터
대인관계 정신치료에 대해 들어보았다. ( 편집자 )
"예전에는 우울증이 무척 까다로운 질환이었지만, '프로작'과 같은
약효가 뛰어나고 부작용이 적은 약들이 개발되면서 지금은 수월하게
치료할 수 있는 질병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전 교수는 "좋은 약들이 잇따라 나오면서 우울증은 약만 먹으면 치료가
끝나는 것으로 대부분의 의사나 환자들이 생각하게 되면서 또다른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고 했다.
즉 약을 먹으면 심한 우울증도 극적으로 호전되는데, 이처럼 증상이
없어지면 '병이 다 나았다'고 판단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재발
가능성이 잠복해 있는 상태에서 치료를 중단하게 된다.
환자들의 인간관계 유형도 치료에 큰 변수가 된다. 예컨대 개인 중심적인
서양인들은 우울증도 개인성향을 띠기 때문에 약물로 치료가 잘 되는
편이다. 하지만 한국인의 우울증은 밀접하고 강렬한 가족관계 등에서
비롯되는 경향이 있어, 약물만으로는 치료가 쉽지 않고 우울증을 유발한
대인관계에 대한 치료를 함께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우울증이 있는 주부들이 치료를 통해 상태가 아주 좋아졌다가도 추석
때 시댁에 다녀오면 치료가 물거품이 됩니다. 다시 몇 달 동안 호전시켜
놓으면 설에 고향을 다녀온 뒤 또 악화되죠. 이는 한국 여성들의
우울증의 원인이 상당 부분 가족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 교수는 "같은 말이라도 친정어머니가 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시어머니가 하면 절대 못받아들이는 며느리가 우울증에 걸렸을 때 우울증
약만으로는 치료가 안된다"고 했다.
김씨를 2~3회 치료하면서 전 교수는 김씨의 우울증이 남편과의 사이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빠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남편은 그녀에게
무관심한 편이었고, 이유없이 화를 내는가 하면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뚱뚱하다" "살림도 못한다"는 식으로 면박을 주기도 했다.
김씨는 "그럴 때마다 우울해지고 모든 일이 귀찮고 과식이 심해졌다는
것이 기억난다"고 했다.
남편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어도 내성적인 성격의 김씨는 속마음을
털어놓지도 못한 채 속으로만 삭였다.
약물 치료와 함께 일주일에 한번씩 50분 가량 상담치료를 받으면서
김씨는 남편과 자신의 역할을 번갈아 가면서 재연하는 등 대화하는
방법을 연습했다. 그리고 집에 가서는 이를 남편과의 관계에서
'실습'을 해보기도 했다. 남편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기꺼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여줬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그녀는 그동안 남편이 더욱 자신에게 무관심하게 될
것이 두려워 자기 의견을 제대로 얘기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편도 늘 답답할 정도로 말이 없던 저를 새롭게 보게 됐다고
하더군요." 김씨는 총 8~10주 일정의 치료 프로그램에 따라 대인관계
정신치료를 받고 있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치료를 받으면서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통제한다는 느낌이 들었고, 자존심이 높아졌다고 했다.
"앞으로는 남편 뿐 아니라 누구와 어떤 문제가 생겨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전 교수는 "폐경기, 월경전 증후군 등의 원인으로 생기는 우울증과
남편, 시어머니 등 인간관계에서 오는 우울증은 구별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전 교수는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을 때 상당수의 사람들이 성격
탓이라고 판단, 이를 방치하는데 사실은 대인관계에서 비롯된 우울증일
가능성이 높다"며 "약물 치료를 해도 재발이 잘 되는 사람들은
대인관계 정신치료를 받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