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평재는 “98년 등단하면서 그 때까지 계속해오던 화가의 길을 접었다 ”고 했다.그는 “내 안에서 분출하고 있는 그 무언가를 다스려준 게 문학 ”이라고 고백했다.

■'마녀 물고기'
이평재 지음
문학동네, 8000원.

이평재(42)의 첫 소설집 '마녀 물고기'(문학동네)와의 만남은 유쾌한
경험이다. 지금까지 우리 문학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낯설고 신비한
풍경들을 만나는 기쁨이 첫 번째고, 그 새로운 풍경들을 묘사하는 이
이야기꾼의 솜씨가 아라비안나이트의 세헤라자드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이
그 두 번째 이유다. 미대를 졸업하고 화가생활을 하다 문학이라는 영토에
뒤늦게 뛰어든 이 독특한 작가는 생물학적 상상력, 신화적 상상력,
그리고 성적 상상력을 자유롭게 풀어헤치며 강력한 흡인력으로 독자의
감정을 자신의 거미줄 안에 옭아맨다.

"나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상상력을
무궁무진하게 증폭시켜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무너뜨림으로써 소설의 공간을 무한대로 확장시키고 싶어한
것이었다."(74쪽)

소설 속 화자의 이런 독백은 작가 스스로의 욕망이기도 하다. 그의 단편
속에 등장하는 낯선 생명체들은 작가의 이런 야심을 흥미롭게 전달하는
매개체다. 태평양 심해를 떠다니는 푸른고리문어, 스스로 몸을 매듭처럼
꼰 뒤 다른 생명체의 아가미를 통해 파고 들어가 팽이처럼 몸을 회전시켜
내부를 갉아먹는 마녀물고기(먹장어), 신경독을 갖고 있어 전갈이나
뱀까지 잡아먹고 사람도 질식사 시킨다는 검은과부거미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면서 몽환적 매력을 뿜어낸다.

작가는 보수적 성관념에 대해서도 짐짓 어깃장을 놓는다. "오늘,
거기털이 갈매기 떼가 날아가는 것처럼 생긴 여자를 그렸는데 아주
예쁘고 환상적이더라."(191쪽)며 누드모델 마야를 그리고, "어머니의
자궁벽에는 굳은살 같은 흠집이 열 군데도 넘을 터였다."(115쪽)며 십여
년에 걸쳐 아이 여섯을 낳아야 했던 어머니의 자궁을 안타까와 한다. 또
"해괴망측하게도 푸른고리문어 입 속의 표피 점막에 싸여 있는 내
성기는 점점 부풀어올라 내 기억 속 어느 여자의 질 안에서보다 강렬하게
반응했다."(93쪽)에 이르면 현실의 성은 훨씬 더 노골적이거나
도발적이적이지 않느냐는 반문을 던지는 듯 하다. 또 신화, 민담, 전설,
고대문명 등 다양한 영역을 차용하면서도 겉돌지 않게 녹여내는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중요한 것은 문학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결국 이야기일
뿐이죠. 그것에다 어떤 형식을 뒤집어 씌우건, 인류의 운명은 이야기의
생명력에 의해 좌우됩니다. 이야기가 고사되는 날…… 그날이 인류가
끝장나는 날이라는 겁니다."(68쪽)라고 '이야기'에 대한 믿음을
보여줬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순간 이 세헤라자드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