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국제사법재판소(ICJ)가 27일, 지난 99년 미국이 ICJ의 ‘잠정 명령(provisional order)’을 무시하고 강도살인을 저지른 독일인 형제에 대한 사형집행을 강행한 것은 국제법상 위법이라고 판결, ICJ와 미국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특히 ICJ의 이번 판결은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유럽 국가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한 것이어서, 주권 침해라며 반발하는 미국과 유럽 간의 자존심 대결로 비화될 가능성도 우려되고 있다.

ICJ는 1946년 설립 이후 처음으로 “ICJ의 잠정 명령은 모든 국가에 구속력을 갖는다”고 판시했다. 유엔 사법기구인 ICJ(본부 네덜란드 헤이그)는 지난 99년 강도살인 혐의로 미국에서 사형된 독일인 형제와 관련한 독일 정부 소송에 대해 “당시 미국은 사형 집행을 연기하라는 ICJ의 명령을 준수했어야 했다”고 판결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총회에서 선출된 각기 다른 국적의 판사 15명(임기 9년·연임 가능)으로 구성된 ICJ 재판부는 찬성 14 반대 1로 “ICJ 잠정명령은 단순한 권고나 요청이 아니라 국제법상 구속력을 갖는다”고 판시했다.

미국 애리조나주는 99년 3월, 은행 살인강도 발터 라그란트(Walter LaGrand·37) 사형집행 27시간 전 ICJ로부터 집행연기 명령을 통보 받았으나, 예정대로 사형을 강행했다. 10일 전엔 공범인 동생 칼 라그란트(Karl LaGrand·36)도 사형에 처했다. 독일에서 태어난 라그란트 형제는 4~5세 때인 1967년 미국으로 이민했으나, 1982년 범행을 저지를 때까지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은 채 독일 국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 정부는 해외에서 유죄 선고를 받은 경우 모국 영사관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1963년 ‘빈(Vienna) 협약’을 미국이 무시했다며 ICJ에 제소했다. 이에 대해 미 사법부는 “사형 연기 요청이 너무 늦었고, 미국은 연방국가여서 각 주의 헌법상 권한을 침해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또 “1984년 유죄판결 후 15년간 모든 공정한 재판절차를 밟았다”며 ICJ의 통고를 무시했다.

ICJ의 이번 ‘잠정명령 구속력’ 판결은 항고가 불가능한 최종 결정이지만, ICJ는 강제집행 능력이 없다. 때문에 미국이 무시할 경우, 미국·ICJ갈등은 미·유럽 간의 갈등으로 비화될 여지를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