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로 가는 숲길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 맑고 청청한 바람은 세속의
욕심을 걷어가고, 끝간데 없이 엉클어진 마음의 실타래까지 시원스레
풀어준다. 그래서 해인사로 가는 길은 산을 오르는 길이지만, 거대한
정신의 품으로 미끄러져 가는 길이기도 하다.
가야산의 의미가 각별한 이유도 해인사가 있기 때문이다. 올라서 발
아래를 쳐다보는 산이 아니라, 첩첩울울한 골짜기나 나무 한 그루에서 또
하나의 나를 대면하는 생명의 전당이다.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이
바로 거기서 그토록 오랜 세월을 인내할 수 있었던 이유도 가야산의
정기와 해인사의 정신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가야산과 해인사는 이미 우리 모두의 역사이자 미래이다. 전국의
국민들이 가야산에 골프장이 들어선다는 말에 분개하고 99년 뜨거웠던
한여름을 더욱 달구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팔만대장경이 봉안되어
있는 가야산과 해인사 인근이 아니었다면 골프장 건설 반대운동에 100만
명이라는 기록을 세울 수 있었을까.
환경운동의 근본이념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검약과 작은 것들의 생명을 지켜내는 불교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것이 불교계에서 환경운동과 생명문제에 대해 가장
적극적이고 실천적으로 나서는 동력일 것이다.
그런데 최근 해인사에서 세계 최대규모의 청동대불을 건립하겠다고 한다.
아파트 15층에 버금가는 43m 높이에 55억원의 재원이 들어간다니 그
규모는 짐작이 갈 것이다. 그 어마어마한 규모만큼 신앙심의 크기가 어떤
비례관계를 가지는지 모른다. 그러나 불상 하나의 규모가 그렇게 커야
하고, 불상 하나를 조성하면서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야 하는지. 이
놀라움이 단순히 먼 발치에서 해인사를 바라보는 아둔한 중생심의 발로일
뿐일까.
이런 말을 하면서도 저어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해인사 역대
큰스님들이 오랜 수행으로 터득한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망발을
늘어놓는 것은 아닌지, 깊은 신앙심을 속된 생각으로 마구 재는 것은
아닌지 송구스러운 마음 없지 않다. 종교적인 이적과 신앙으로
보통사람들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을 이뤄낸 사실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나는 삼의일발이 수행자의 재산목록 전부라는
검약정신과, 속도와 물질의 무한충족을 좇는 요즘의 세태를 통렬히
꾸짖는 큰스님들의 사자후를 들어 왔다. 손바느질로 기워 입은 스님들의
장삼은 거룩함 그 자체이다. 10여년 전 돌아가신 성철스님도 물질로 남긴
것이라고는 수십 번 기운 솜누비장삼과 검정고무신이 전부 아니던가.
물량주의와 거대담론에 휘둘리는 인류의 욕망을 걷어내는 것이
환경운동이다. 그리고 그 사상적 젖줄이 불교에 있다는 점에서
환경운동과 불교는 참으로 가까운 사이다. 불교와 환경운동을
인연맺어주기 위해 해인골프장 소동을 겪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
정도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물 한 방울의 존재를 세상의 어느 가치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이 종교의 참정신이라고 믿었다. 오늘날의 환경파괴는
끝을 모르는 물질적 욕구에 그 근본원인이 있다면, 불교는 이처럼 변이된
인간의 물질적 욕구형질을 선의 추구와 이타심으로 되돌려놓으려는
가르침이다. 마땅히 가야산 해인사의 청동대불 건립 계획은 흰 종이에
다시 그려야 한다. 해인사 그리고 불교가 소욕지족의 가르침을 올곧게
지켜주고, 그 가르침을 독경소리와 목탁소리에 실어 세속으로 전해주길
간절히 바란다.
(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