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월버그를 뒤에 두고 파리 시내를 질주하고있는 박중훈.아래 사진은조너선 드미 감독과 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 “한국배우 이름 걸고 이 악물고 뛰었다 ”##


한국 배우로 처음 할리우드 영화에 진출한 영화배우 박중훈의
'촬영기'를 독점 연재한다. 박씨가 조나단 드미 감독의 '찰리의
진실'(The truth about Charlie)에 전격 발탁된 것은 홍콩 배우 주윤발,
이연걸의 할리우드 진출에 비견되고 있다. '찰리의 진실'은 제작비
5000만 달러의 대작으로, 흥행과 비평에서 두루 좋은 평을 받는 일급
감독(조나단 드미)과 스타들(마크 월버그, 팀 로빈스)이 나온다는 점에서
큰 기대를 모은다. 할리우드 영화에 참여한 한국 톱스타의 내면에서 영화
선진국 촬영 현장에 대한 생생한 목격담까지, 지난 4개월 동안 파리에서
촬영한 이 영화의 경험을 박중훈이 직접 쓴다. (편집자)

촬영이 막바지에 달했던 며칠 전입니다. 주연 배우인 마크
월버그('퍼펙트 스톰'과 '부기 나이트' 주인공이었지요)와 제가
중요한 물건을 서로 먼저 차지하려고 파리 시내를 미친듯 달리는 장면을
찍었습니다. 몇시간째 계속되는 힘든 촬영 때문에 마크와 저는 거의
쓰러지기 일보직전이 되었지요.

마크는 힘들다고 계속 푸념과 호소를 했지만, 저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한국 배우들은 저리도 체력이 약할까?"라고
생각할까봐, 겉으론 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몰래 화장실에 가서 토하고, 수돗물로 입을 헹군 다음, 다시 현장에
와서는 웃기까지 하였습니다. 뭐, 꼭 그럴 필요까지 있었을까 하고
의아해하실 수도 있겠지만, 제 행동과 말 하나 하나가 한국 배우와 한국
영화를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이를
악물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푸른빛 지구가 조용히 돌아가는 미국 유니버설 영화사의 로고를 촬영
내내 곳곳에서 봐와서 일까요. 낯선 할리우드 영화를 찍는다는 설레임도,
최소한 파리에서 촬영했던 동안만큼은 더 이상 설레임이 아닌
'생활'이었습니다. 영어로 대사를 하며, 할리우드 명감독과 유명
배우들과 작업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다른 언어, 다른 문화, 다른
시스템에서 오는 긴장도 제게는 큰 부담이었는데, 충무로의 '명예'까지
생각을 하며 생활하다 보니 항상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그래도
가끔씩 파리에 있는 백건우ㆍ윤정희씨 부부의 격려가 힘이 되었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영화계 선후배들의 따뜻한 전화도 제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더욱이 운 좋게도, 파리서 촬영하는 동안 제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파리를 포함한 프랑스 전역 25개 극장에서 일제히 개봉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덕분에 그곳 신문 방송 잡지와 기자회견까지
했고, '동양에서 온 무명 배우'만은 아니었던 것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작년초 미국 선댄스 영화제에서 보고 저를
캐스팅한 조나단 드미 감독을 만나기 전, 그가 굉장히 괴팍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그가 연출해 아카데미 감독상까지
받았던 작품이 '양들의 침묵'(올해 '한니발'이라는 무시무시한
속편까지 낳은)이고, 또 다른 영화 '필라델피아'도 에이즈 환자의
고통을 처절하게 표현한 문제작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실제 그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작년 12월 파리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조용한 호텔 로비에서 거리낌없이 아이처럼 소리치며
깡총깡총 뛰다가 저를 부둥켜 안았습니다. 그리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제가 연기한 우형사의 팔자 걸음을 목을 쭉 빼고 흉내낼
정도로 장난기 많고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 전, 그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시나리오에도 없는 제 단독 씬을
넣어야겠는데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속으로 물론 기뻤죠! 하지만
심각한 얼굴로 시치미를 떼면서 "당신은 정말 위대한 감독입니다.
너무도 정확한 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라고 말해서 서로 한바탕
웃기도 했습니다. 감독으로서의 명성과 재능을 떠나, 이웃집 아저씨 같은
조나단 드미와 가까와진 것은 이 영화를 통해서 얻게 된 기쁨 중의
하나입니다.

(영화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