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 밤에 드디어 비가 내렸다. 한밤을 다 새우며 이대환의 '슬로우
불릿'(실천문학사)을 읽고 비를 맞아들이는 새벽을 보았다. 많지도 않은
비를, 그러나 목마른 세상은 그 한 방울도 잃지 않겠다는 듯 온힘을 다해
받아들이고 있었다. 여기에는 일종의 엄숙함조차 깃들어 있었다…….
소설은 본질을 하나로 정의할 수 없다고 말한 서양의 문학이론가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서구의 소설을 망라하는 몇 가지 특징을
파악하고자 했었다. 그에 따르면 소설은 무엇보다 사랑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는 또한 세상에는 사랑 이야기가 아닌 좋은 소설도 있다고
했으니, 이대환의 '슬로우 불릿'은 바로 그런 이야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슬로우 불릿(slow bullet)이란 미국의 고엽제 후유증 환자에게 붙여진
명칭이다. 베트남에 참전했던 우리의 선배들 가운데도 그런 이들이
있으니, '슬로우 불릿'은 바로 그들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전혀 낭만적인 위안을 위한 문학은 아닌 셈이다. 시·소설 할 것 없이
연문학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이 시대에, 전쟁에 나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얻어 돌아온 사람의 고통을 그린 이야기라니. 이대환이라는
작가는 시류를 모르거나 아니면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미'의 소유자가 아닐까?
우리에게는 베트남이 필요하다고, 나는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 전에 이미 베트남은 우리 곁에 존재했었다. 이데올로기와 경제적
이익을 명분으로 우리는 젊은이들을 '타인'의 전쟁터로 실어 날랐고
그곳에는 죽음과 학살과 부패와 라이따이한과……, '죽음에 이르는
병'의 씨앗이 있었다. 그가 바로 김익수라는 인물이다. 또한 그의 두
아들에게도 그 '죽음에 이르는 병'은 유전되니, 그들이 바로 영호와
영섭이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갈 것이므로 우리는 베트남을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되리라.
그러나 '슬로우 불릿'을 읽는 이들은 비평가 황광수 선생이 말했듯 이
작품이 증언을 뛰어넘는 힘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방민호ㆍ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