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지난 47년 주도해서 만든 이래 계속 터줏대감 노릇을 해왔던 유엔 인권위원회로부터 3일 「축출」되는 이변이 발생했다. 이날 제네바에 위치한 인권위 위원국 선거에서 미국은 서유럽·북미 그룹 의석(3석) 선거에 나섰으나, 54년만에 처음으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유엔 인권위는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COSOC) 산하 기구로, 모두 53개국으로 구성되며 매년 각국의 인권 남용 사례를 모니터하고 관련 결의안을 채택한다. 유엔 인권위는 매년 전체 위원국의 3분의1을 지역 그룹별로 재선출(임기 3년)하며, ECOSOC 소속 회원국 54개국이 투표로 결정한다. 미국은 이날 프랑스(52표)-오스트리아(41표)-스웨덴(32표)에 이어 29표를 받는데 그쳤다.
아시아 지역 선거(3석)에서는 한국이 모두 42표를 얻어, 바레인(45표)-파키스탄(38표)과 함께 선출됐다. 이로써 한국은 지난 93년 이래 계속 인권위원국으로 활동하게 됐다. 이날 선거에선 그간 국제 사회의 인권 비판 단골 대상인 수단도 위원국으로 선출됐고, 리비아·시리아·베트남 등도 현재 위원국이다.
미측은 예상 밖의 선거 결과에 당혹하고 있다. 미국의 유엔 대사대리인 제임스 B. 커닝햄(James B. Cunningham)은 『결과에 실망한다』고 밝혔고, 민간 단체인 「인권 감시」측은 『위원회는 이제 인권 탄압 깡패들의 전시장이 됐다』고 개탄했다.
그러나 유엔 외교가에선 이날 미국의 인권위 축출에 미국의 적만 아니라, 우방들도 「가담」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통상 유엔 선거에서 각국은 서로 지지 투표를 약속하는 거래를 구두 또는 문서로 한다. 미국도 문서로 40여 국으로부터 지지 약속을 받았지만, 실제 이날 비밀 투표에선 결과적으로 「배신」당했다.
이날 투표 결과는 각국이 미국의 국제사회에 대한 태도에 반발이 드러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미측의 유엔 연체 분담금 5억8000만 달러나 되는 데다, 부시 행정부가 최근 교토 환경 의정서 이행을 거부한 것이나 미사일 방어(MD)체제를 추진하는 것 등에 대해 각국이 반발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일련의 외교 정책과 이를 미국의 「오만」으로 받아들인 각국의 인식이 결국 지난 반세기동안 각국 인권 상황에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해 온 미국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미국의 유엔 인권위 탈락은 또 미 보수파들의 유엔에 대한 적대감을 더욱 부채질할 가능성이 크다.
(유엔본부=이철민특파원 chulm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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