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5일, 충남 보령에서 보스턴마라톤 대비 훈련을 하던 이봉주(31)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췌장암으로 투병 중이던 아버지의 사망 소식에 그는 아스팔트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시드니에서 못 푼 한(한)을 보스턴 우승으로 풀어드리려 했는데….”
그리고 40여일이 지난 17일 새벽(한국시각). 이봉주는 “이제 아버님 영전에 월계관을 바칠 수 있게 됐다”고 울먹였다. 이봉주가 레이스를 하는 동안 그의 어머니 공옥희(66)씨는 충남 천안의 집 사랑방에서 기도를 올렸다. “조마조마해서 못 보겠다”던 어머니는 딸 이경숙(34)씨가 “우리 동생 이겼다”고 외치자 안방으로 달려 나오며 “봉주야”라고 크게 외쳤다.
작년 호주 시드니올림픽 현장에서 아들이 레이스 도중 넘어지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봤던 어머니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사흘 전에 전화를 걸어 ‘아버지 영전에 금메달을 꼭 걸어드리겠다’고 했는데, 기어이 해냈어요.”
합숙훈련 중이던 아들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려야 했던 어머니는 아직도 미안하다고 했다. 아버지를 사별한 어머니가 식사도 못한 채 누워만 있자 이봉주는 “어머니 때문에 운동이 안 된다, 제발 기운 내시라”며 훈련을 1주일쯤 쉬기도 했다.
이봉주는 ‘오뚝이’였다. 92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황영조의 그늘에 가려 있을 때도 묵묵히 연습만 했다. 1993년 호놀룰루마라톤 우승 후 변변한 성적을 못 내던 그는 96애틀랜타올림픽 은메달, 96후쿠오카마라톤 우승, 98로테르담마라톤 2위(한국기록 수립) 등 승승장구하며 세계 톱랭커 대열에 합류했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 자신을 길러준 정봉수 감독의 코오롱과 결별, 위기를 맞았다.
소속팀 없이 오인환 코치, 몇몇 후배들과 함께 시골 여관을 전전하며 재기를 노린 이봉주는 지난 2월 일본 도쿄마라톤에서 2시간7분20초의 한국기록을 수립하며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악재. 삼성전자 입단 후 당차게 도전했던 시드니올림픽에서 24위에 머물러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좌절은 없었다. “시드니의 ‘한’을 꼭 풀겠다”며 자신과 어머니에게 수없이 다짐했다. 작년 12월 후쿠오카 마라톤에서 2위를 차지하며 이봉주는 한국마라톤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봉주가 오는 일요일 49재를 지내러 집에 오겠다고 했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리곤 남편이 좋아하던 ‘솔’ 담배와 소주 한 병을 사랑방 영정 앞에 놓으며 “우리 아들이 1등 했수”라고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