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모(54·토목기사·강남구 학동)씨는 최근 고2 아들의 책가방에서 무협지가 쏟아져 나와 깜짝 놀랐다. 성적이 최상위권인 아들은 “학교 수업은 너무 지리하다”며 “친구들끼리 ‘무협지 계’를 짜서, 각자 30~40권씩 무협지를 빌려온 뒤 학교 사물함에 쌓아놓고 수업 중에 읽는다”고 했다. 권씨가 담임에게 상의하자, 담임은 “수업시간에 무협소설 쓰는 아이도 있는데, 읽는 걸 가지고 뭘 그러느냐”고 했다.

충남의 한 대안학교. 일반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이달 초 부산 D고에서 전학온 박영호(가명·18·고3)군은 “전에 다니던 학교에선 진도가 워낙 빨라 단 한번도 수학 수업을 제대로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반에서 40등을 맴돌았던 박군에게 중상위권 학생에게 맞춘 학교 강의는 실력차를 극복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보충반 수업 때 ‘너희들은 맞아야 정신차리는 소 돼지 같은 놈들’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며 박군은 파르르 떨었다.

한국 교실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산술적 평등주의’다. 학습능력이 천차만별인 아이들을 한 ‘제조공정’에 몰아넣고 똑같은 교과와 진도를 강요하는 기계적 평등교육이 모든 가치에 우선한다. 당연한 결과로, 몇년치 교과서를 미리 뗀 상위권은 “수준 낮아 못 배우겠다”고 냉소하고, 하위권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다”고 자포자기한다.

“과거엔 학교별로 동질집단이 형성됐지만 74년 평준화 이후 지금은 뒤죽박죽이다. 못 따라가는 아이는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에스컬레이터를 타듯 고학년 진급만 계속한다. 결국 한글로 제대로 된 문장을 못쓸 만큼 기초학력이 부실한 고등학생도 나오게 되는 것이다.(경기고 민흥기 교장)”

평준화제도는 다수를 만족시킨다는 명분으로 시작됐지만 정작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10여종의 교과서가 나오지만 교육부가 내용은 물론 단어 갯수와 페이지 분량까지 까다롭게 규제한다. 장래 희망이 외교관이든 정비공이든 모든 학생이 단일 교과서로 배워야 하는 게 한국의 평등교육이다.

미국 보스턴의 사립고교 밀튼 아카데미. ‘수학’ 한 과목만 12등급으로 나눠져 있다. 12등급은 한국 고교보다 수준이 훨씬 낮지만, 1등급은 근처 MIT에 가서 AP(Advanced Placement·고1때부터 대학 강의 듣고 대학 학점을 미리 따는 제도) 수업을 듣는다. 이 학교 김영식(가명·16)군은 “쉬운 등급에서 A를 받는 것과 높은 등급에서 A를 맞는 것이 다른 대접을 받는다”며 “아이비리그 대학에 가려면 AP 과목을 6~7개는 들어야 한다”고 했다.

평준화는 뛰어난 아이를 평범한 아이로, 일시적으로 뒤처진 아이를 영영 낙오자로 만드는 ‘평둔화’로 변질됐다. 대안으로 등장한 ‘능력별 수업’은 학생 능력과 무관하게 똑같은 시험문제로 일괄 평가하는 내신제도. ‘우열반 부활’을 규탄하는 학부모의 반발 때문에 좌초 일보직전이다.

전남 B여고는 작년 초 영어·수학에 한해 ‘심화반’ ‘기본반’ ‘보충반’으로 나눠 수준별 이동수업을 실시했지만 곧 중단했다. 3학년 수학 담당 이영철(가명·55) 교사는 “공부에 뜻이 없는 보충반 아이들은 수업시간에 난리 법석을 떨고, 수능이 쉽게 나오니 심화반 아이들도 심드렁하더라”고 했다.

결국 문과·이과의 상위 40등까지 80명을 뽑아 방과 후 따로 심화반을 만들었지만, 학생들 불만은 여전했다. 박지은(가명·18·고3)양은 “차라리 그 시간에 학원에 다니게 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선진국도 평등교육을 지향한다. 그러나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는 건 ‘기회’일 뿐, 결과와 대가는 천차만별이다. 작년 3월 교환교수인 남편을 따라 미국 동부에 살던 강숙자(가명·48)씨는 딸 민희(가명·15)가 다니는 공립 중학교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민희의 수학 실력이 뛰어나 중학교에는 더이상 가르칠 과정이 없다”며 “인근 고등학교에서 강의를 들을 수 있게 스쿨버스로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왜 저 아이만 고교 수업을 듣게 해주느냐” “왜 저 아이 하나를 위해 스쿨버스를 동원하느냐”고 항의하는 학부모는 한 명도 없었다.

미적분을 하는 아이와 기초연산도 못하는 아이를 뒤섞은 교실에 국가경쟁력의 근간인 수월성(수월성)이 발붙일 자리는 없다. 과학고, 외국어고 등 영재들의 숨통을 틔워줬던 특목고도 설립취지가 퇴색한 지 오래다. 이런 토양 위에서 점수 따는 기계는 양산될 수 있어도, 21세기 지식기반시대를 이끌어갈 창의적 리더는 나올 수 없다.

MIT에서 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 다국적 기업에 근무중인 박찬희(가명)씨. 유학 첫해는 한국인 선배들에게 ‘족보’를 받아보며 시험을 준비해 좋은 성적을 올렸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할 2년째, 3년째가 되면서 차차 벽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박씨는 “초기에 내가 ‘미분기하학이란 이런 것’이라고 설명해줬던 미국 친구가 나중엔 난해한 최신 이론을 나에게 설명해주게 됐다”며 “인구나 교육열만 보면 이미 세계적인 과학 기술자가 수없이 나왔어야 할 우리가 왜 일류대를 나오고도 MIT에 와서 기죽어 지내는지 알 것 같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