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몰래 자본주의 음악 배우며 연애에도 빠져”##


1979년 열 세살 나던 해 나는 대학에 입학했다. 북한의 예술계 대학은
여기와 달리 예능계 중고등학교를 별도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대학
안에 예비교육반 3년, 전문부 3년, 대학부 4년의 편제를 두고 있다.

평양음악무용대학 생활 초반은 너무도 즐거웠다. 대학 배지를 가슴에
달고 거리로 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곤 했다.
일반학교의 학생들과 달리 농촌지원이나 집단체조 등 일체의 동원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고, 식량 교복 등의 공급에서도 특혜를 받기
때문이다.

오후에는 내내 전공강의실에서 악기만 연습할 수 있었다. 베토벤,
슈베르트, 차이코프스키 등 세계의 유명 클래식은 기본이고 그 외 금지된
자본주의 곡들도 몰래 배웠다. 음악의 세계는 사상과 이념을
뛰어넘는다고 생각했다. 그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는지도
모른다.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도 남달리 컸던 시기였다. 그 때 읽은 학생잡지의
기사가 생각난다. '10년후의 우리 생활의 변화'라는 제목이었는데 10년
후에는 사람이 일어나면 자동 센서가 스스로 사람의 행동을 감지하여
방안을 밝혀 주고 집에 앉아서 TV화면으로 그날 신문을 읽으며 학생들의
학습을 도와주는 TV도우미가 나온다는 등 당시로서는 꿈같은 일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북한 사회가 참 좋은 사회이며 우리의 미래생활은
잡지기사의 내용처럼 희망찬 것이라고 믿었다. 10년이 지나서 그때 봤던
잡지의 기사가 떠올랐는데 세상은 거꾸로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북한
사회는 점점 더 쇠퇴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예비교육부를 마치고 전문부 3년 과정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북한의 모든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군사편제로 조직이 짜여진다. 즐겁기만 하던
대학생활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대모임, 중대모임, 소대모임, 분조모임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학생이
아니라 군인이 된 기분도 들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사상투쟁도
생활총화도 더 강화됐다.

그런 통제속에서도 젊음이야 어디 가랴. 연애는 수정주의 날라리풍이라고
해서 금지되었지만 내가 속한 학급만 해도 전문부 졸업 즈음에는 연애 안
하는 학생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열악한 교통환경에서 조금만 늦어도
집까지 걸어가기가 일쑤였지만 여자친구를 바래다 주고 집까지 걸어갔던
사랑의 추억도 갖고 있다.

그러다가 대학의 본 학부 과정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 나이 뭇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회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8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의 경제는 계속해서 제자리 걸음, 혹은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었다. 평양의 형편도 나날이 나빠졌다.

그런데 그렇게 못 사는 나라라고 교육받아온 남한에서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생각하면서
북한에서 교육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점차 깨달아갔다.

그때부터 나뿐 아니라 주위의 친구들도 남한에 대해 점차 관심을 가지고
방송을 몰래 청취하는 친구들이 늘어났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주위의 친구들끼리는 무슨 얘기든 거리낌 없이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공유하곤 했다.

88서울 올림픽이 다가오면서 대학가에는 남한 가요들이 불려져 하나의
문화현상으로까지 자리잡았다. 남한 가요를 모르면 '왕따'가 되기
십상이었다. 정치성이 없는 인간의 진솔한 삶에 바탕을 둔 남한가요들이
젊은 대학생들에게 많이 불려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대학시절은 많은 문학작품을 읽은 시절이기도 하다. 북한에서는
작가들에게만 허용되는 '100권 한정판'(100권만 발행)은 보통 사람들은
접하기 힘들었으나 친구들 사이에 소리 없이 돌려 읽혀지고 있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뇌리에 남는 음악대학 한 교수님이 당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나는 여러 사회에서 살아보았다. 이승만 정권에서도 살아봤고, 소련에서
유학생활도 해봤고, 과오를 범하고 지방탄광에서 노동도 해봤다. 지금
우리 사회는 뭔가 근본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 역사적으로 지성이 등돌린
세상이 오래 가는 시대는 결코 없었다."

이런 말씀을 하신 교수님께서 얼마나 더 견뎌냈는지는 알 수 없다.
희망에 넘쳐 시작한 대학생활이었지만 결국 젊음의 꿈을 키워주는 장소는
되어주지 못했다. 그나마 대학생활의 추억을 잊지 못하는 것은 그 속에
함께 웃고 울고 뒹굴며 정의를 논하던 어릴 적 친구들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유지성·34·평양음악무용대학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