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보험재정이 파탄의 길을 가고 있다. 지역의보의 경우 국고지원
결정으로 재정위기를 한시적으로 넘겼으나 이번에는 직장의보의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어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이대로 방치할 경우
의료보험의 재정이 파산으로 내몰릴 것이라는 위기감에 정부와
국민건강공단은 의료보험료를 대폭 인상할 수밖에 없다는 눈치같다.
정부의 보험료 인상 결정이 국민의 호응을 얻으려면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정부정책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하고, 인상근거와 시기에 대한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정책당국은 의료보험을 통합하고 의약분업을
실시하면 의료보험제도의 개혁이 완성되는 것처럼 장담해 왔다. 더욱이
지난번 의료대란의 수습과정에서도 대다수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거듭 보험료를 인상하였고 수가를 대폭 올려주는 등 의료계 달래기로
일관했었다. 이로써 수입은 천천히 증가하는 데 비하여 지출은 빠르게
증가하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정부를 믿고 매번 보험료 인상에 순종할
수 있겠는가.
선진각국의 경우 1980년대부터 의료보험개혁을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해
왔으나 한국의 정책당국은 안일한 자세로 일관해 왔다. 국제경제환경이
바뀌었고 한국경제의 성장률이 점차 둔화되고 있다. 고령자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으며 만성병의 증가, 의료이용의 증가, 국민들의 건강에 대한
관심증가 등 보건의료의 여건이 크게 변모되고 있다. 그러므로 25년 전에
설계된 낡은 의료보험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현실에 맞는 제도를
다시 설계하고 새로운 틀을 짜 나가야 한다.
앞으로 정부는 국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편리한 환경에서 다양하고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국민들이 감당할 수 있는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정책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최근 보건의료의 개혁에
성공한 싱가포르의 보건의료 정책에서 우리는 값진 교훈을 도출할 수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가난 때문에 필요한 의료를 이용할 수 없는
경우가 생겨나서는 아니된다는 점과 누구도 방만하게 의료를 이용해서는
아니된다는 점을 함께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해 싱가포르 정부는
의료서비스 제공자, 의료 이용자 모두에게 도덕적 해이와 낭비를 최대한
줄여 나가도록 제도적 장치를 설정하고 있다.
향후 국민의료비는 가파르게 상승할 전망이다. 게다가 국민들의 요구에
상응하여 급여범위의 확대, 그리고 의료 서비스 질의 향상 등을 통하여
보험기능을 확충시켜 나간다면 더 한층 의료비 지출이 증대될 것이다.
따라서 적절한 유인구조를 설정하여 의료비를 억제해 나가는 정책적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현재의 후불제에서 선불제로 진료
보수의 지불방법의 개선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포괄 수가제와 HMO형 보험자 소유병원 제도의 도입과
아울러, 유럽 선진국에서 도입된 바 있는 총액계약제를 실시하는 방안을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이미 재원조달기능에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현행 의보제도를 보충,
장기진료비와 노인진료비를 충당하기 위한 추가적 재원조달기구로
의료저축계정을 도입하여 보험재정의 기반을 확충해 가는 노력이
중요하다. 공공부문의 점진적 확충에 의한 1차의료의 강화, 비용
효과적인 예방의료의 확대, 그리고 주치의 제도와 의료분쟁조정 제도의
도입, 의료기관의 경영투명성 제고 등도 아울러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당정에서 신설을 검토하고 있는 건강증진세는 일단 세원의 안정적
확보라는 장점은 인정된다. 그러나 사전에 지출용도를 미리 지정하고
손쉽게 거두어들일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재정의 경직성과 낭비를 몰고
올 가능성이 높아 재정전문가로부터 비효율적이라는 비판을 강하게 받고
있다. 더욱이 교육, 문화, 예술, 체육계 등의 비슷한 요구에 대해서도
같은 배려를 해야 할 것이라는 점도 감안되어야 할 것이다. 방만한
의료비 지출 경향을 차단하지 않은 채 이를 보험료 인상이나 세금의
추가징수로 도와주는 방식은 국민경제에 큰 부담을 안겨줄 것이다.
(덕성여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