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
윌리엄 l. 랭어 엮음
박상익 옮김, 푸른역사
사건이나 인명으로 가득한 무미건조한 역사책이나 역사의 대중화를 내건
저급한 얘기책에 실망한 독자라면,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가 대안이
될 법하다. 서양사의 주요 흐름을 대표적인 사건별로 묶은 이 책은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역사읽기의 재미를 맛보게 해준다. 케임브리지대학
고대사 교수인 모지즈 핀리와 맨, 옥스퍼드 대학 근대사 교수인
트레버-로퍼, 저명한 해전사 연구자인 올리브 위너 등 당대 최고 수준의
역사가들은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부터 에스파니아의 세르반테스까지
모두 17가지 주제를 통해 역사를 조망한다.
고대 노예제 사회를 설명하기위해 저자는 해방 노예출신인 노예상인
티모테오스의 일생을 실마리로 삼는다. 최근 고대 그리스 도시
암피폴리스 유적지에서 발견된 묘비의 주인이다. '아울로스에게 해방된
자유민, 노예상인'으로 적힌 비문에는 출신과 직업이 당당하게
기록돼있다. 티모테오스의 생애를 통해 노예가 획득되는 과정부터
노예시장의 거래 관행, 검투사를 비롯한 전문기능노예가 등장하는
과정까지 손쉽게 이해할 수있다. 이를 통해 고대 그리스의 화려한 문명이
노예 무역과 노예의 생산활동을 통해 가능했다는 거시적 관점까지 자연히
얻을 수있다.
BC 399년 소크라테스는 불경죄와 젊은이를 타락시킨 죄를 범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배심원단 501명은 소크라테스에게 유죄
281표, 무죄 220표를 던졌다. 국외로 탈출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한달후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신다. 사람들은 다수의 폭정에 대한 증거로 그의
죽음을 들었고, 그의 재판은 신화가 됐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당시
아테네의 정치현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중해의 최강자였던 아테네는
BC 431년 벌어진 스파르타와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참패를 맛본다.
게다가 수많은 시민을 살해한 독재정부까지 등장해 민주정을 뒤엎었다.
곡절끝에 막 민주정을 회복한 아테네 시민들에게 그 체제를 비판하고,
아테네 인들이 섬기던 신을 비판하는 소피스트를 지지한 소크라테스는
적으로 비쳤을 법하다.
피와 땀을 지닌 인물을 단서로 역사의 베일을 열어젖히는 작업은
이어진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샤를마뉴 대제를 통해 서유럽
기독교 문명의 본질에 접근하거나 16세기 황금기를 구가한 에스파냐의
영광과 몰락을 돈키호테에 투영하는 식이다. 쉬우면서도 수준을 유지한
'역사 대중화'의 전범을 제시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