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간회 활동 집중보도, 일경과 잇단 마찰...민족운동 일선 나서 ##


민립대학 설립운동, 물산장려운동, 신간회운동, 문자보급운동, 신생활
운동….조선일보는 보도와 논설을 통해 일제 당국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번영과 독립을 위한 사회운동을 적극 주도하거나 알리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3.1운동 기념행사라든가 6.10 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등 항일운동의 보도를 통해 민족 자존의식 확산에 앞장 선
것도 조선일보였다.

"신간회의 창립 준비가 된다 하는 것은 일부 식자 사이에는 근자 적이
화제에 오르는 바이었거니와 그는 이제 사실로써 세간에 공개하게 됐다.
민족운동의 견지에 있어서 획기적 회합이 되기를 기하고 금후에 그에
상당한 노력을 하겠다는 것이 발기인들의 의기이다. 이는 조선인된 자가
누구나 진지한 고려를 요할 시대 의식을 대표한 자이다. … 이러한
처지에 있어서 족히 외래하는 압력을 견디어가며 또 대중의 신뢰를
집중하여 그 최후의 신지에까지 가는 것은 존귀하고 또 지난한 일이다.
그 충분한 고려 및 준비가 있기를 빌지 않을 수 없다."(1927년 1월
20일자 사설 '신간회의 창립 준비-진지한 노력을 요함')

일제하 국내 최대의 민족운동 단체였던 신간회는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민족주의 세력 일부에서 제기되던 자치
운동에 반대하기 위해 사회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만든 조직이었다.
따라서 조선일보는 신간회의 활동을 보도하는 데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조선일보는 1927년 1월 14일자에 신간회 강령을 단독 보도한
데 이어 17일자에는 발기인 28명 명단을 또 특종 보도했다. 앞의 사설은
1월 19일 신간회가 정식으로 발기한 직후 실린 것으로 신간회의 목적과
과제 등을 널리 알리고 있다.

신간회와 조선일보의 유대는 창립과 동시에 더욱 본격화했다. 1927년 2월
15일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YMCA) 강당에서 열린 신간회 창립대회의
사회를 본 사람은 조선일보 사주이자 부사장이었던 신석우였다. 또한
사장 이상재가 회장으로 추대되고 주필 안재홍이 총무간사를 맡았으며
편집국장 한기악, 영업국장 이승복, 지방부장 장지영, 판매부장 홍성희가
간부로 참여하는 등 조선일보 주요 인사들은 대부분 신간회에 가담했다.
뿐만 아니라 기자와 본사 사원, 지국 종사자까지 신간회에 적극 가입해서
활동했다. 당시 상황을 일제 경찰이 발간한 '조선출판경찰개요'는
"(조선일보) 사원의 거의가 전부 신간회의 주요 지도 간부에 취임, 회의
획책모계를 사내에서 행할 뿐 아니라…각 지방에 있어서 집회 등에 있어
불온한 언동을 하여 경찰관으로부터 금지 또는 중지를 명령받는 것은
거의가 조선일보 기자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사회주의자들의 해소론에 의해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산되기까지 그 활동 상황을 알리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했다.
'신간회 기사 일속' '신간회 각지 소식' 등의 고정란을 두어 본부와
전국 각지 지회의 활동 내용을 상세히 보도하는 한편 사설·논설을 통해
이를 뒷받침했다. 또 1928년 1월 1일자부터 25일자까지 '전 민족적
단일당의 조직과 임무에 대하여'를 연재하며 신간회가 나아갈 바를
제시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일반적으로 '신간회의 기관지'로 인식됐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신간회 선전부 일을 맡았던 언론인 이관구는
"신간회는 조선일보를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프레스 캠페인을
전개했다고 볼 수 있다"고 회고했다.

조선일보의 민족운동 지원은 창간 직후부터 이미 시작됐다. 1922년 우리
민족의 손으로 대학을 세우려는 민립대학 설립 운동이 다시 시작되자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12월 1일자에 '조선 민립대학 발기에
취하야, 후진을 위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이라는 기사를 실었고,
7일자에는 '민립대학 준비위 포고문 준비회원은 이상재·한용운·장덕수·
송진우 등 유지'라는 보도가 이어졌다. 또 운동이 본격화한 1923년에는
한해동안 113건의 기사를 게재하면서 중앙의 움직임 뿐 아니라 국내외의
지부 결성과 후원 행사를 상세하게 알렸다.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맞서 우리 민족의 경제적 자립을 추구하는
물산장려운동에도 조선일보는 적극 가담했다. 1920년 봄 평양의 개신교
지도자들에 의해 조선물산장려회가 처음 만들어졌고 1923년 1월에는
서울에도 조직이 만들어졌다. 조선일보는 1923년 6월 1일자부터
19일자까지 18회나 관련 기사를 연재하며 이를 집중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민족운동을 보도하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
민족운동의 일선에 나서기도 했다. 1929년 7월부터 대대적으로 시작한
문자보급운동이 그것이다. 이미 1927년 1월 1일자에 '한글'란을
신설하여 우리 말과 글을 널리 보급하고 발전시키는데 힘을 기울였던
조선일보는 1929년 1월 1일자에 '새해에는 우리 말과 글에 힘을
들이자'는 글을 실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조선어 철자법 개정안이
나오자 이를 상세히 보도한 후 다음달부터 문자보급운동을 시작했다.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하는 학생들을 교육하여 고향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게 한 이 운동은 첫 해 409명의 학생이 참여했고 그 숫자는 1930년
900명, 1931년 1800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조선일보사는 문자보급반을
위한 교재인 '한글원본'을 만들어 전국의 지사·지국을 통해 무료로
배포하면서 이들을 지원했다. 문자보급운동이 절정에 이른 1931년 배포된
'한글 원본'은 30만부에 이르렀고 전국의 강습생은 2만8000명으로
집계됐다. 심훈의 저 유명한 소설 '상록수'는 조선일보 문자보급운동
현장이 배경이 된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