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은 불과 1년 전까지 한국의 최대 재벌이었다. 「유동성이
나쁘다」는 루머가 시중에 다소 나돌기는 했지만, 정주영 전
명예회장과 그 학당의 제자들로 구성된 현대 경영진은 재계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정치실세들도 현대라고 하면 한수 접어주었다. 국민의
정부와도 밀월관계를 계속 유지, 다른 재벌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불과 1년 만에 현대는 그룹 존망의 위기에 몰리고 있다. 계열
생보사인 현대생명은 영업정지를 당해 사실상 문을 닫았고, 계열
건설사인 고려산업개발은 부도처리됐다. 현대투신증권은 정부가
구제금융을 주지 않으면 생존이 어려워지는 상황에 몰려 있다.

불과 1년 사이에 왜 이렇게 됐을까. 일차적인 원인은 오너인
정몽헌 회장의 판단착오에 있었다는 게 시장의 평가다. 그는
경영위기를 인정하지 않고 방만한 경영을 계속했으며, 마지못해 위기를
인정한 다음에도 「신속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또 참모들은 자리
보신에만 신경을 쓰고 채권단이 요구하는 구조조정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위기의 근본 원인을 분석해가다 보면 「정치와 경제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사업을 하는 현대 오너들의 정치적 도박성과 마주치게 된다.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지난 92년 국민당을 만들어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기성 정치인들과 맞붙었다. 대선에 패배한 후 현대는 「업보」로 김영삼
정부로부터 은행 신규여신을 중단 당하는 보복을 당해 「시퍼런 멍」이
들었다.

정몽헌 회장은 부친의 곤욕을 보고도 별다른 교훈을 받지 못한 듯하다.
그는 상업성이 불투명한 금강산 사업에 수천억원을 쏟아부었고, 정치적
도박성이 섞인 대북투자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룹이 흔들리고
있다. 현대는 DJ정부의 긴급 지원 덕분에 자금난을 겨우겨우 넘기고
있으나, 올 들어 이행된 자구노력은 거의 전무하여 경영정상화가 요원한
실정이다.

이 때문에 현대의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은 속이 바싹바싹 타 들어가는
상황이며, 다른 은행들은 자금을 더이상 물리지 않기 위해 현대와의
금융거래를 계속 줄여나가고 있다. 현대그룹은 올해 1조7000억원 이상의
추가 자구를 조속히 이행해야 어느 정도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정몽헌 회장은 자구노력 대신 한국경제를 담보로 잡고
대마불사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듯하다.

더 나아가 현대는 요즘 정치적 타결을 통해 경영위기를 수습하려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대북사업 창구인 현대아산은 최근 은행들에
수백억원 긴급지원을 요청했다. 또 정부가 금강산 관광객 입산료(하루
100달러)를 대납해주고, 금강산 관광 유람선이 정박하는 고성항
부두시설을 인수해줄 것도 요청했다.

정부가 만약 금강산사업을 지원하지 않으면 남북화해에 금이 갈 수도
있다는 게 현대측의 자금 요청 논리다. 현대측의 다급한 자금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는 민간기업의 영리사업에 국민세금을 지원해
달라고 떼를 쓰는 격이다.

한국 경제는 2년 전 재계랭킹 2위인 대우그룹의 도산이라는 큰 홍역을
치렀다. 당시 김우중 회장은 자구노력 대신 정치적으로 경영위기를
풀려고 하다가 결국 실패했고, 국민들에게 80조원의 은행빚을 안겨놓은
채 해외로 도피했다. 현대가 대우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뼈를 깎는
자구 노력밖에 다른 대책이 있을 수 없다. 정치적 타결을 통한 위기
해결은 일시적인 효험을 볼지는 몰라도 계속 성공할 수는 없다는 게
대우사태의 교훈이다.

( 경제과학부 부장대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