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에 불씨를 던졌던 박준채(87·전
조선대 대학원장)씨가 7일 오전 11시55분 광주시 한국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당시 광주고보 2학년이었던 박씨는 1929년 10월 30일 오후, 광주를 떠난
통학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했을 때 일본인 학생 후쿠다 슈조(광주중 3년)
등이 박씨의 사촌누나 박기옥(광주여고보 3년)씨에게 다가와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는 것을 보고 『왜 학생들이 의롭지 못하게 행동하느냐』며
후쿠다를 내려쳤다. 이 사건은 당시 객차에 있던 한국학생들과
일본학생들의 집단 패싸움으로 번졌고, 이는 '광주학생운동'으로
이어졌다.
사건 후 경찰에 연행된 박씨는 경찰로부터 '조선학생인 네가 무조건
잘못했으니 사과하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다음날인 11월 1일에도
싸움은 계속됐다. 그러나 박씨의 선후배들이 '너는 경찰이 주목하고
있으니 빠져 있으라'고 만류, 박씨는 이후 시위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틀 후인 11월 3일, 일본 메이지 천황(명치천황)의 생일을 맞아
광주고보, 광주농업, 광주사범, 광주여고보 학생들이 일제히 항거,
시위행진을 벌였고, 일본인들은 이에 당황했다. 이때 광주고보 학생 중
일부는 일본학생을 편들어 보도한 일본어 신문 '광주일보' 본사를
습격, 윤전기에 모래를 끼얹기도 했다. 당시 광주의 학생들은 서슴없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으며, 독서회의 지도자들은 학생들의 항일투쟁을
격려하고 후원했다.
사고 후 박씨는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양정고보로 전학했으며, 옥고를
치르는 등 일본 경찰의 끈질긴 시달림을 당했다. 박씨는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 조흥은행에서 잠시 근무하다 60년부터
조선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법정대 학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퇴임 후 광복회, 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이사로 활동했던 박씨는
국민훈장 석류장(1988년)과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을 수상했다. 평소
가족들에게 "광주학생운동 당시를 회상하면 동료들 얼굴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진다"는 말을 자주했던 박씨는 지난해 10월부터
치매증상을 보이다 3일 전부터 의식불명상태로 누워 있었다. 유족은 부인
김정옥(84), 아들 영근(54·재미 건축가) 형근(신용보증기금 강남지점장)
상근(52·재미의사)씨 등 5남2녀, 발인 9일 오후 1시, 장지
대전국립현충원. (062)380-3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