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가 '리얼리즘'이 됐다. 몇 년 전만해도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로 취급 받았던 소설 속 사건들이 실제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 중독 살인' '자살 청부업자' 등 최근에 발생했던
'판타지적 사건' 들은 몇몇 젊은 작가들이 특유의 문학적 촉수를 통해
이미 예지했던 사례들. 당시에는 '황당한 SF'로 취급 받았지만 지금은
'판타지'가 아닌, '리얼리티'가 돼버린 사건들이다.

지난 4일 인터넷 머드(MUD) 게임에 중독된 14살 중학생이 초등학생인
동생을 살해했다는 뉴스는 소설가 김민영(33)씨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듯
하다. 99년 12월 김 씨가 발표한 장편소설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전6권ㆍ황금가지)은 머드게임에 중독된 한 주인공이 현실과
가상세계를 구별하지 못하고 의식분열을 일으킨 가운데 대낮 교회 앞에서
칼로 국회의원을 살해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팔란티어'라는 게임
속에서 너무도 완벽한 가상 세계의 환경에 익숙해진 나머지 게임 안에서
자신이 선택한 폭력적인 캐릭터의 성격을 현실세계에서 '발휘'해 버린
것이다.

동생을 죽인 피의자 양 모 군은 중 1학년 때부터 머드게임인
'이스이터널'과 '영웅전설' 등에 심취, 자신의 홈페이지에 "사람을
죽여보고 싶다"는 글을 올리는 등 사이버 공간의 폭력성을 현실세계에서
'구현'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양군이
가상세계의 캐릭터(등장인물)를 현실세계의 동생과 착각해 살인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자살사이트가 속출하고 심지어 돈을 받고 자살 희망자의 가슴에 칼을
꽂은 사람도 있다는 최근의 보도는 소설가 김영하(34)씨의 96년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문학동네)에서 이미 예견됐다.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의 직업은 '자살 청부업자'로 스스로 죽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돈을 받고 그들의 죽음을 '지원'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문학평론가 도정일(60)씨는 이 작품을 판타지로 규정하면서
"사람들의 삶을 단축해 주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살 안내인이라는 직업
자체가 판타지"라며 "독자는 이 작품을 읽을 때 '그런 직업이
어딨어'라는 질문을 던지지 말고 읽어나가야 한다"고 했었다.

또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원작이었던 박상연(29)씨의 소설
'DMZ'(민음사)도, 발표 당시에는 리얼리티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아
아깝게 '오늘의 작가상'에서 떨어졌었다. 그러나 의심받던 리얼리티는
이듬해 판문점 내에서 '김훈 중위의 자살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그
진가를 인정 받았다.

문학평론가 김동식(문학과사회 편집위원)씨는 "비현실적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현실의 영역에서 분출하고 있는 혼란스러운 세상"이라며 "현실
속에서 이미 잠복해 있던 가능성들을 짚어낸 작가들의 해석력이 돋보이는
사례들"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