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39강에서 도올은 번역의 중요성을 열변했는데, 바로 그것이
내가 그의 논어해석을 문제삼는 이유이다. 한국문학작품 영역에 오래
힘써 온 사람으로서 나는 늘 문학작품의 번역은 언어적 지식만으로는
어림없고, 원작이 작가의 의식을 통해서 쓰여지기 전단계인 무의식
속에서 형성된 과정까지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제대로 번역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해 왔다.
일개 학문적 이론을 번역하기 위해서도 그 이론가의 개성과 그 이론의
형성배경을 충분히 이해해야하는데, 하물며 공자 사상을 기술서처럼
번역해서야 되겠는가? 문구만 가지고는 "불역군자호"를 "내가
군자다"로, "사무사"를 사랑예찬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논어 해석으로는 분명 틀린 해석이다. 공자의 인품과 그의 제자교육의
목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심오한 동양고전을
이런 식으로 깊은 성찰 없이 30~40권이나 번역했다면 결코 자랑할 일이
못된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 자신과 같이 '기층민' 이었던 것 같이 공자의
제자들은 대부분 공자처럼 관리지망생들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당시에
농노나 다름없었던 '민'은 아니고 특권층도 아닌, 다분히 유동적인
중간계층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공자의 문하에서 얻고자 했던
것은 관리가 될 자격(학문과 식견)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고시제도가 없기도 했지만, 공자의 학단은 고시학원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공자는 스스로도 '쓰임'을 구했고,
제자들도 '쓰임'을 얻을 수 있는 사람으로 기르려고 했지만, 동시에
제자들이 '벼슬'이라는 잿밥에 마음을 둘까봐 '군자'의 도리를
전심전력으로 지도하며 가르쳤다. 인격수양이 완료된, 즉 '인의예지'가
체화된 '군자'만이 공자가 양성하고 싶은, 진정으로 백성을 편안케
하는 관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공자가 계속 관리로서 등용되려고 힘썼다는 사실에 무한한 경외심을
느낀다. 공자처럼 미적 감각이 예민하고, 속되고 더러운 것을 싫어하는
군자가 세상의 온갖 아니꼬운 꼴을 다 봐야하고 별의별 비방과 모함을
감당해야하는 벼슬자리를 적극적으로 구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그렇게 멋을 알고 유유자적하는 즐거움을 사랑했던 공자가 '쓰임'을
구했던 것은 나라에 덕치가 행해지지 않으면 힘없는 백성들이 통치자에게
짓밟히고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군자들이 다 고고하게
안빈낙도만 즐기고 현실을 몰라라 한다면 백성은 계속 전쟁에 동원되고
사역에 시달리고, 굶주리고 불안한 생을 이어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백성의 괴로움을 외면하는 사람을 어찌 의인, 인자, 군자라 하겠는가?
"거친 밥 먹고 물 마시고 팔 구부려 베고 잠을 자도 즐거움이 그 안에
있으니 재산과 명예는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다"(논어 술이 15)고 했던
공자는 강호와 더불어 한가롭고 우아한 삶을 누렸으면 가장 행복했을
것이다.
민초들에게서 민주적 능력이나 자기결단의 가능성을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자는 계급주의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의
고고함과 자기가 좋아하는 지적 추구를 희생하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 굴욕적인 고난의 '유세'를 계속했다. 나는 이것을
십자가형을 감수한 예수와 같은 위대한 사랑이요, 희생이라고 본다.
예수는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씻어주기 위해 자신의 젊은 생명을
바쳤고, 공자는 불쌍한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수십년의 고난과
굴욕을 기꺼히 짊어졌다. 공자의 인(仁)은 온정적 자애를 훨씬
능가하는 뜨거운 애정이고 강력한 실천의지였다.
(서지문ㆍ영문학자 jimoon@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