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는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의 순서가 있다. 「안기부 자금」
사태에도 여러가지 측면과 정치적 공방의 주제들이 있지만 거기에도 가장
1차적으로 해야 할 일과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의 순서가 있다. 그런
순차성을 밟아야만 집권측의 입장에서나 야당의 입장에서나 각자의
정당성을 주장할 근거를 얻을 수 있고, 사건 자체도 교통정리가 될 수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가장 1차적으로 있어야 할 일은 그 액수나 사실 인지에
이의가 있을망정 결과적으로 국가의 공금을 선거에 사용한 것으로 된
한나라당 의원들이 그 「움직일 수 없는」 사실에 대해 국민 앞에
사과하는 것이다. 그 돈이 안기부 예산인 줄 모르고 받았다는 사실관계
소명은 그 다음의 일이다. 집권측이 그것을 기화로 「야당 죽이기」와
「이회창 죽이기」를 하고 있다는 반격도 그 다음에야 할 수 있는
일이며, 「명단유출」 시비나 「DJ 비자금」 공격도 그런 이후에 해야만
설득력을 갖는다.
모르고 받은 것이 확실하다 해도 국가예산이 한 정당의 선거자금에
유용됐다고 하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면 사과하는 것 이외의 다른
방식이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이회창 총재가 즐겨 말하는 정도다. 이
총재가 하든 돈 받은 당사자들이 하든, 또는 당의 이름으로 하든
『우리는 전혀 모르고 받았지만 사실이 확인된 마당에 이르러서는 정말
부끄럽고 죄송합니다』라는 대국민 사과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통과절차를 거친 다음에 한나라당과 당사자들은 얼마든지 이의도
제기하고 해명도 할 수 있으며 역습도 할 수 있고 폭로도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전면투쟁도 할 수 있다. 집권측이 차제에 야당을 휘청거리게
만들겠다는 속셈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그에 대한 한나라당의
저항은 먼저 「나랏돈 유용」이라는 결과 자체에 대한 자괴와 자책에
바탕할 때 비로소 국민적 공감을 얻을 수 있다.